[사랑과 자비]따뜻한 눈물을 흘리자

  • 입력 2005년 2월 25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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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 목사가 하루는 훌쩍 훌쩍 울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아내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오늘은 슬픈 날이야. 십자가를 생각하는데도 감동이 없어.”

감동이 없는 메마른 가슴을 아파하며 울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잘못된 길로 나갈 수 없다. 스펄전은 가장 많이 울었기에, 19세기에 가장 강렬한 영향을 미친 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우는 것은 능력이다.

4복음서에는 모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온다. 그중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차별성이 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누가 8:6)고 한다. 식물이 자라는 절대 조건은 습기다. 흙이 없어도 수경재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습기의 공급이 없으면 죽는다. 살리는 것은 습기에 있다.

사람의 감정도 식물과 마찬가지로 습기가 필요하다. 사람은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울어주는 사람을 통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사회의 많은 요소들이 말라 가는 것은 비판 부족 때문이 아니다. 습기 부족 때문이다. 가슴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사랑의 부족 때문이다. 눈물 없이 직언하면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눈물과 함께 직언하면 변화를 가져온다. 어머니의 질책 앞에서 자녀들이 상처를 입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울 수 있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대인 의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그 수용소에서 어떻게 견디었는가를 물었다. 그는 “나는 눈물과 한숨으로 견디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삶을 포기한 사람은 울지 않는다고 한다. 삶을 포기하면 경계심이 사라지고, 아끼던 모든 것도 낭비하더라고 한다. 그리고 죽더라는 것이다. 눈물 없는 사회, 습기 없는 사회는 메마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사회가 된다. 사회 각 분야에서 안타까워하며 우는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 지극히 약해 보이지만, 사실 그 사람들이 사회에 생명을 주는 구원자들인 것이다.

서울 청파동 삼일교회 목사 전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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