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912년 일제 ‘고등법원 판결록’ 한글 번역

  • 입력 2005년 1월 6일 17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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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 장군의 독립군자금 모금활동에 강도죄를 적용했으며 일본 헌병보조원을 사살한 의병에 대해 강도살인죄를 물어 처벌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제의 법원은 또 황실이 사찰에 하사한 부동산에 대해 매매가 불가능하다고 밝히는 등 조선 관습을 근거로 한 판결도 많이 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법원도서관(관장 손용근·孫容根 부장판사)이 번역해 6일 발간한 ‘고등법원 판결록’에서 밝혀졌다. 이 판결록은 1909년부터 1943년까지 대한제국 대심원 및 통감부·조선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선고된 민형사 사건의 판례집으로 현재의 대법원 판례집에 해당한다. 이번에 번역한 것은 총 30권 중 1권(1909∼1912년)이다. 법원도서관은 앞으로도 매년 2, 3권씩을 번역해 발간할 예정이다.》

▽김좌진 장군의 군자금 모금은 강도 행위=김 장군은 서울 육군무관학교 졸업 후인 1911년(당시 22세) 북간도독립군사관학교 설립에 필요한 군자금 조달을 위해 족질(族姪)인 김종근 씨를 찾아갔다가 경찰에 잡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상고심(3심)인 고등법원은 1911년 8월 21일 “피고인 김좌진은 다른 사람들과 친척집으로 돌입해 재물을 강취할 것을 공모했다”며 “피고인이 친척집을 다른 공범에게 알려만 주는 역할에 그쳤기 때문에 감형 대상이란 주장은 이유 없다”고 밝혔다.

또 경술국치(1910년)를 전후해 강원지역에서 활동한 강두필 의병대장의 부하로 보이는 김두수라는 사람은 수괴(강두필)의 지시에 의해 부하를 지휘, 헌병보조원 2명을 사살한 혐의로 기소돼 교수형을 확정 선고받았다.


그가 살인죄뿐 아니라 강도죄를 적용받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기록으로 분명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헌병보조원의 무기를 노획한 행위에 대해 강도죄를 적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관습을 판단 근거로 한 판례가 많아=민사사건 판결록 중에는 조선의 관습을 판단 근거로 삼은 판례가 많다. 판결록에 실린 125건의 판례 중 30여 건을 제외하면 모두 대한제국의 특수한 법규나 관습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고등법원이 “황실에서 사찰에 하사한 부동산은 절대 처분할 수 없다는 것이 조선의 관습”이라며 매매행위 자체를 무효화한 사례. 조선 세조가 절에 하사한 논밭을 이 절에 소속된 모든 승려의 결의를 얻어 매입했지만 이 관습을 근거로 거래가 무효화됐다.

또 자식을 부양할 의무를 지닌 쪽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로, 첩이 따로 살면서 사생아를 키우는 데 든 비용은 아버지가 나중에라도 부담해야 한다며 ‘첩에게 금전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밖에 △여자는 유산상속인이 될 수 있지만 집안의 대를 이을 가독(家督)상속인은 될 수 없다 △상속 후 호주가 되면 선대의 채무를 무한으로 승계해야 한다 △본처에게 자식이 없으면 서자가 유산을 상속한다는 판결 등도 조선의 관습을 인용한 사례다.

▽기타=1894년 갑오개혁 때 과부의 개가가 허용됐으나 사대부에게 과부의 재혼은 수치스러운 일이어서 재물로 막으려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신모 씨는 재혼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시댁으로부터 논밭과 가옥, 소 등을 받았지만 나중에 약속을 어겨 재물반환 청구소송을 당했다. 신 씨는 “갑오개혁 이후 과부의 재가가 허용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평생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계약은 무효”라고 항변했으나 패소, 재물을 반환해야 했다.

1910년 9월 9일 이병식 씨의 부인과 첩은 남편이 김치홍 씨에게 살해되자 곧바로 김 씨를 살해한 뒤 자수했다. 재판부는 “친족이 살해된 데 대한 분노의 감정을 억제할 틈도 없이 복수한 것은 사람의 감정에 비추어 용서돼야 한다”며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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