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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2월 3일 16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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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91년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판권란을 보고 있노라면 이보다 더 부적절한 출판 시기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노동의 신성함을 숭상했으며 사회주의적 이상을 버리지 않았던 어느 급진주의자의 생애를 담은 책이 하필이면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가 기정사실화된 1991년에 출판됐으니 말이다.
그 탓에 이 책의 결말에는 시대 분위기가 어려 있다. 물론 책은 스코트 니어링이 죽은 1983년 8월 24일에서 끝이 나지만, 그 죽음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인용할 때는 분명히 20세기 후반의 세계사적 격동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대중을 움직이기 위해 한 세기 내내 뭔가 하려 했으나, 그 노력은 외형상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삶은 획득이나 축적보다는 꿈과 노력으로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마지막 문장을 쓸 때, 저자인 존 살트마쉬는 사회주의적 실험은 이제 역사가 됐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책은 1998년 미국에서 ‘사상적 전기’라는 부제가 ‘자작농의 길’로 바뀌어 재출간됐다. 다분히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 소박한 삶을 내세운 당시의 분위기를 염두에 둔 듯하다. 그 즈음, 한국에서도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부부의 소박한 삶의 방식은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헬렌의 영적인 잠언들에 비해 스코트의 정치와 사상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그 당시만 해도 다들 정치가 아니라 경제가 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코트 니어링 평전’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이 한국에서 출판됐다. 이제 이 책을 읽는데 지금보다 더 적절한 시기는 없는 듯 느껴진다. 경제학자에서 톨스토이주의자로, 또 사회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그리하여 자작농으로 삶을 마감한 스코트의 일생은 세계 불화의 본질이 자본주의에 있음을 끊임없이 폭로한다. 인상적인 게 있다면 그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인간의 품성과 육체노동을 연결시킨 근거도 여기서 나온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구원을 버리지 않는 급진주의자가 됐다.
스코트 니어링이 지금도 다시 읽힐 수 있는 근거는 이 자기구원에 있다. 잉여자본은 인간을 타락시킨다. 경제 문제는 정치 문제다. 이 명제는 여전히 현재적이다. 예컨대 청년실업을 해결하라고 말할 때, 문제는 경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정치문제이기도 하다. 안정된 직장을 위한 ‘취업 전선’에 내몰릴 때, 청년들은 세계를 비판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다. 경제가 모든 이슈를 잠식할 때, 정치는 몰락해간다. 단지 재미없다는 이유로 책을 읽지 않는 청년들에게 안정된 직장이 그렇게 중요한가? 스코트 니어링이 20세기 미국의 ‘왕따’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유의 질문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를 내세워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사회에서 왕따가 되는 일은, 스코트 니어링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자면 ‘바른 길을 걷는 일’이 될 것이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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