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임금의 인장’ 기록한 보인소의궤 영인본 나와

  • 입력 2004년 11월 1일 18시 31분


90년만에 복원한 '대조선국보'
90년만에 복원한 '대조선국보'
조선의 국새 옥새는 몇 종류가 있었고 어떻게 달랐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보인소의궤’의 영인본(학연문화사)이 최근 출간됐다. 보인소(寶印所)는 임금의 인장인 보(寶)와 왕세자나 왕비 및 정부기관의 인장인 인(印)의 제작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 보인소의궤는 이 보인소에서 제작한 보와 인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76년(고종 13년)의 기록이 유일하다. 이 의궤는 당시 경복궁 교태전에 불이 나서 보인이 훼손되자 ‘조선국왕지인’과 ‘대조선국왕상상지보’ 등 보 6과와 ‘왕세자인’ 등 인 5과를 49일간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영인본의 해제를 쓴 손환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보는 크게 사용처에 따라 어새(御璽) 어보(御寶)와 국새(國璽) 옥새(玉璽)로 나뉜다. 어새 어보는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宗廟)에 모셔져 제의용으로만 사용된다. 국새 옥새는 실무적 국사에 사용됐고 임금의 행차에 이를 실은 보여(寶輿)를 앞세웠고 왕위 계승식 같은 공식 의전에도 쓰였다. 국새 옥새는 다시 인사와 공무 처리 등에 쓰이는 신보(信寶)와 책봉과 외교문서에 쓰이는 행보(行寶)로 나뉘는데 초기에는 3, 4과에 불과했지만 후대로 가면서 수십 과로 늘어났다. 예를 들어 ‘시명지보(施命之寶)’는 종3품 이상에게, ‘유서지보(諭書之寶)’는 그 미만의 관료에게 지시를 내릴 때 쓰였다.

국새 옥새는 6·25전쟁 때까지 80여과가 남아 있었으나 부산 피란 시기 화재로 모두 없어져 현재는 진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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