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84]소설가 김훈-영화제작자 심재명 대담

  • 입력 2004년 3월 31일 19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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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윤상선 기사 yoonss@donga.com

그래픽 윤상선 기사 yoonss@donga.com


《올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훈씨(56)와 지난해 ‘바람난 가족’을 만든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41)가 ‘읽기와 생각하기’를 주제로 동아일보 창간 84주년 기념 특별대담을 가졌다.

김씨는 소설가로서뿐 아니라 저널리스트와 칼럼니스트로서 필명을 떨치고 있으며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다. 심씨는 1992년 명필름의 전신인 ‘명기획’을 세운 이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비롯해 ‘접속’ ‘조용한 가족’ 등 10여편의 히트작을 만들었다.

최근 문화계에서는 한국 영화의 상승세를 중심으로 ‘영상문화’가 각광받는 반면 ‘활자문화’는 침체일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씨는 활자문화의 대표주자로, 심씨는 영상문화의 대표주자로 나와 이 같은 문화현상을 진단했다.》

▽김훈=심 대표를 만나기 전에 딸(30)한테 물어봤습니다 “영화판의 유능한 여걸”이라고 하더군요. “신화적인 존재”라고도 했습니다.

▽심재명=김 선생님의 ‘칼의 노래’와 ‘화장’을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칼의 노래’는 문장이 단호하고, 박력이 있더군요. 단문으로 쓰여 속도감이 있는 데다 ‘생각의 힘’ 같은 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따님이 영화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지요.

▽김=서강대 영상대학원을 나와 지금은 영화사 ‘싸이더스’의 직원으로 있습니다. 단편영화로 ‘일상에 대한 구토’라는 걸 만들기도 했지요. 제가 제작비로 1000만원을 댔습니다. 생활에 찌든 나이 많은 남자가 나오는데, 꽁초 수북한 재떨이가 화면을 메우기도 하지요. ‘얘가 내 이야길 이렇게 만들다니…’ 하는 생각도 들고, 아찔했습니다. 걔는 앞으로 연출보다 심 대표처럼 ‘엔터테인먼트 매니저’를 하겠답니다. 일종의 ‘곡마단 단장’ 같은 거지요.

▽심=‘곡마단 단장’요?

▽김=딸한테 한 말입니다. 딸이 “돈 벌어 아빠 편하게 해준다”고 해서, “너나 잘 살아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요즘 젊은층의 에너지가 영상문화로 많이 몰리고 있지요. 책을 읽으려면 정좌(正坐)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는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만나는 즐거움이 너무 많지요. 게다가 책에는 이미지도, 사운드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 오기 전 ‘책 속에 과연 길이 있나’ 하고 생각해 봤어요. 참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어요. 책은 언어의 구조물이며, 그 ‘속’에 길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요. 하지만 그게 과연 현실적인 힘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심재명 대표(왼쪽)와 김훈씨가 서울 종로1가 훈민정음 서문이 새겨진 한 빌딩 벽 앞에서 '읽기와 생각하기'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이미지 시대에도 활자매체는 여전히 중요하다는 데 동의했대. 김미옥기자

▽심=이런 건 있지요. 명필름 영화 중 ‘공동경비구역 JSA’가 있습니다. 작가 박상연씨의 소설 ‘DMZ’를 영화로 만든 겁니다. 최인훈씨의 ‘광장’을 벗어나 독특한 시각으로 분단을 다룬 소설이지요. ‘조건반사’가 키워드인데요. 반공 이데올로기에 젖은 남북한 병사들이 자주 만나 절친하게 지냈지만, 막상 ‘위기상황’이 발생하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로 총격전을 벌인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 제작 당시 비무장지대(DMZ)에서 근무하던 ‘김훈 중위 사망 사건’이 이슈가 되기도 했어요.

▽김=김훈 중위 사망 사건이라고…있었지요.

▽심=그래서 여러 모로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선생님 소설 ‘화장’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환자나 화장품 회사 중역을 둘러싸고 인상적인 대목들이 많던데요.

▽김=해부학 책을 갖다놓고 공부했습니다. 컬러 사진이 많아 혈관이나 뼈, 근육 같은 걸 샅샅이 들여다봤지요. 임상의나 간병인도 만났습니다. 사람 죽는 것을 많이 보더군요. 화장품 회사도 들러보고, ‘코스모폴리탄’이나 ‘알루어’ ‘바자’ 같은 잡지들도 봤어요. 아내가 “아니, 이 양반이 나이 들어 왜 갑자기 화장품 잡지를 보고 그러지” 하고 궁금해 하더군요.

▽심=‘칼의 노래’는 김탁환씨가 이순신 장군을 다룬 소설 ‘불멸’과 함께 KBS 사극의 공동 원작이 된다면서요?

▽김=‘칼의 노래’는 명량해전부터 이순신이 숨지기 3년 전까지를 다뤘어요. 내면을 중점적으로 써내려갔지요. ‘불멸’은 이순신의 인생 대부분을 사실적으로 다룬 작품입니다. 둘이 합쳐져야 일대기를 사극으로 만들 수 있겠지요.

▽심=역사소설을 쓰려면 아무래도 옛날 책들을 보셔야 했을 텐데요.

▽김=‘난중일기’ ‘난중잡록’ ‘임진록’ ‘연려실기술’ ‘징비록’ ‘선조실록’ 같은 책들을 읽었어요. 뭐, 국민 교양 독서 수준의 책들이지요. 책을 읽고 나선, 나머지는 지어냈습니다.

▽심=이순신의 내면이 많이 들어가 있으니까요.

▽김=‘아리랑’을 영화로 만들고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심=‘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이 ‘아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둘 다 원작이 있으니까요. 원작 ‘아리랑’은 중국 혁명에 참가했던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담은 님 웨일즈의 논픽션이지요. 이게 없었다면 영화화를 생각할 수 없었을 거예요. 웨일즈는 김산을 스무 번도 넘게 인터뷰했다고 합니다. 영화로 옮기기 위해 벌써 2년째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김=한국 영화계를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듭니다. 뛰어난 제작자는 많지만, 영화 비평이 약하더군요. 감독론이나 연기자론, 작품론이 없고 인상비평에 머문다는 느낌이에요.

"인류가 공감하는 고전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심=영화 주간지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가 한국이라더군요. 영화가 부상하니까 문자 매체들도 함께 성장하는 상황이지요.

▽김=‘1000만 관객 시대’라고 하면 여러 방향의 담론들이 나와야 하는데, 산업적으로 성공한 측면만 너무 부각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가 다수(多數)가 좋아하는 것만 너무 따라가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지요. 방송도 시청률이 낮으면 일단 없애는 경향이잖아요.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도 접속률을 먼저 따지니…. 다수가 옳다는 쪽으로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심=선생님의 ‘칼의 노래’도 독자들이 많이 봤잖습니까. 독자들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김=내가 다음 작품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생계비를 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에요. 많으면 좋겠지만 기본만 되면 될 것 같다는…. 이미 ‘1000만 영화’가 나왔지만, 베스트셀러 책도 그 정도는 안 되고, 책이 ‘마이너하게’ 되는 게 맞다고 봐요. 다양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게 문화의 건강성일 수 있으니까요.

▽심=선생님도 글에 이미지를 많이 넣으려고 하시죠?

▽김=문자에 영상과 음악성을 넣으려 합니다. ‘칼의 노래’에는 처음부터 남해 섬들에 꽃이 피는 원경(遠景)을 묘사하는 것이 나오지요. 그럴 때 제 카메라는 아주 멀리 나가 있는 겁니다. 롱샷부터 시작해 시체에 구더기가 끓고 있는 클로즈업까지 카메라를 끌고 오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문체가 바뀌고, 음악성이 발생하지요. 그러나 이것이 영화가 주는 직접적인 재미나 감동을 넘어설 수는 없지요. 문자가 주는 한계니까요. 영화의 힘은 참 막강하지요?

▽심=영화도 한계가 있습니다. 깜깜한 극장에다 사람들을 들여다 놓고 수동적으로 지켜보게 만들지요. 사람들을 가장 수동적으로 만드는 건 텔레비전이고요. 가령 문학은 읽다가 마음에 안 들면 중단할 수도 있잖습니까. 아까 영화비평을 말씀하셨지만, 현재 영화인들한테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요즘은 영화뿐 아니라 컴퓨터 게임, 만화로 쏠리는 편중 현상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어요. 이미지는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너무 쏠리는 건 위험한 측면이 있어요.

▽김=사람한텐 읽기, 듣기, 말하기, 보기의 네 박자가 갖춰져야 합니다. 인터넷은 ‘말하기’에 치우친 거죠. ‘들으려는 사람’은 없고, 너도 나도 자기 글 쓰는 데 몰두해 있는 거죠. 영화의 경우 보기도 듣기도 아니고, 오히려 ‘동화(同化)돼 버리기’라고 할 수 있지요. 패션, 디자인 이런 것도 ‘보기’에 해당하기보다 즉각 ‘동화돼 버리기’를 요구하는 것 같아요.

▽심=문학에서 영화로 옮겨온 분들한텐 두드러진 점이 보입니다. 시를 써온 유하 감독이나, 소설을 썼던 이창동 감독(문화관광부 장관)의 경우가 그렇지요. 이 감독이 만든 ‘박하사탕’은 문학적 상상력이 참 돋보였어요. 시간을 역행시키는 구조가 그랬지요. 처음부터 영화에서 출발한 감독과는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부러운 분들이 더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독서광이에요. 싸이더스의 차승재 사장은 책을 1년에 100권 정도 읽는다고 들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읽는다니까요. 저는 신문 문화면을 읽고 인터넷을 뒤져 보는데도 그나마 ‘정보의 홍수’에 서 있구나 하는 생각을 늘 하지요. 요즘 어떤 책을 보십니까?

▽김=(책을 꺼내 놓으며) 이제마의 ‘격치고(格致藁)’입니다. 조선조 사상의학자지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써놓았습니다. 사운드도 이미지도 없습니다. 이런 책들을 젊은이들한테 읽으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바깥에 너무 재미있는 게 많으니까요. 질책할 수도 없지요. 자연스러운 모습이니까. 우리 집 아이들(딸과 아들)은 인문학적인 바탕이 전혀 없어요. 옆집 아이들도 그렇고요. 그런 애들이 어떻게 감각만 가지고 영화를 제대로 만들어낼까 의문이에요. 하지만 언젠가 자기들이 공감할 영화와 문화 양식을 만들어 나가겠지요. 그러려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사(自然死)하면 그 다음은 그 아이들이 (문화를 만들기 위해) 나설 차례니까요.

▽심=‘자연사’하시면, ‘그 아이들’은 책을 잊고 살까요?

▽김=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신세대도 자라나니까요. 인간이 영원히 공감할 대목들은 분명히 있고, 그런 것들을 담고 있는 책들은 분명히 있지요. 인류를 바꾼 책들 말입니다.

▽심=어떤 책들을 말씀하시는지요?

▽김=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한때 인류의 절반을 바꾼 책이었지요.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찰스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성경’ ‘사서(四書)’와 ‘삼경(三經)’….

▽심=선생님은 책을 어떻게 골라 보세요?

▽김=제 독서 습관엔 편협한 측면이 있어요. 책을 처음 보면 이게 내가 읽어야 할 책인지 금방 알아요. 내 관심사에 딱 들어오면 읽습니다. 매년 주제를 정해서도 읽습니다. 우선 그 방면을 잘 아는 선생님을 찾아가서 부탁을 드리지요. 그러면 읽기 쉬운 책부터 서지를 마련해 줍니다. 지난해에는 ‘동양미술사’였어요. 고유섭 선생님의 책이 참 좋더군요. 올해는 2월까지 ‘현의 노래’를 쓰느라, 아직 주제를 정하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안 읽고 있는 편인데, 참 좋습니다. 책 자꾸 읽을 필요 없어요.

▽심=(웃음) 저는 알퐁스 도데의 단편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찰스 램의 수필집 같은 것은 언제 읽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선생님, 늦게 시작하셔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좋은 책 많이 써주세요.

▽김=좋은 영화 많이 만들어 주십시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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