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극 ‘길’ 공연 백성희씨 “60년 무대 외길… 후회없는 그 길”

  • 입력 2004년 3월 31일 19시 07분


연기인생 60년을 맞아 자전적 극 ‘길’에 출연하는 원로배우 백성희씨. 아래는 1950년 6·25전쟁 당시 미군 위문공연을 온 메릴린 먼로와 함께 찍은 사진.    -박영대기자
연기인생 60년을 맞아 자전적 극 ‘길’에 출연하는 원로배우 백성희씨. 아래는 1950년 6·25전쟁 당시 미군 위문공연을 온 메릴린 먼로와 함께 찍은 사진. -박영대기자
“저는 그저 ‘외길 속의 외길’을 살아왔습니다.”

60년 동안 연극만을, 그것도 국립극단에서 연기생활을 해온 원로배우 백성희씨(80)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무대데뷔 6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길’(극본 이윤택·연출 김혜련)이 14∼19일 서울 대학로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길’은 백씨가 후배 연기자(김소희)에게 자신의 인생과 연극에 대해 얘기하는 자전적 내용의 드라마. 극중에서는 백씨가 출연했던 대표작 ‘뇌우’ ‘베니스의 상인’ ‘메디아’ ‘갈매기’ ‘달집’이 손숙, 권성덕, 장두이 등 국립극단 출신 배우들의 극중극 형식으로 재연된다. 백씨는 “자전극을 연습하다 보니 내 인생이 연극인지, 연극이 나인지 잘 모르겠더라”고 말했다.

“소학교 5학년 때 일본 유학을 갔던 외삼촌이 일본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팸플릿을 가져오셨어요. 나는 남자 배우들인 줄 알았는데 삼촌이 ‘이건 남자가 아니라 여자야’ 하시는 거예요. 그때 온 몸이 화끈 달아올랐지요. 여자라구? 그럼 나도 할 수 있겠구나.”

고교시절, 빅타무용연구소에서 가극연기를 시작한 백씨는 1944년 함세덕 선생이 연출한 ‘봉선화’를 통해 신극 무대에 공식 데뷔했다. 이후 연출가 이해랑 선생의 눈에 띄어 극단 신협에 들어갔다. 신협이 1950년 국립극장의 전속극단이 되면서 이후 국립극단에서만 400여 작품에 출연했다.

‘길’은 이윤택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백씨와 장시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한 특별 헌정작품. 이 연극에는 여자의 몸으로 60년간 배우생활을 하면서 겪은 어려움과 연기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자가 광대짓을 한다’고 혼냈던 아버지에게 들킬까봐 이름(본명 이어순)도 백성희로 바꾸어 활동했던 이야기, 소설 ‘벙어리 삼룡이’의 작가 나도향의 동생이었던 남편과의 사랑과 별거….

연출가 김혜련씨는 “이 작품은 원로배우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뿐 아니라 생생한 연기인생을 담고 있어 일반 관객들은 물론 젊은 예술지망생들과 부모가 함께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씨는 국내에서 최초로, 또 유일하게 여성으로서 국립극단장(1972년, 91년)을 지낸 ‘연극계의 여걸’로 꼽힌다. 절제된 감정과 정확한 발음으로 ‘리얼리즘 연기의 교본’으로도 평가받는 그는 또한 아직까지 연습실에서 후배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선배다. 1950∼60년대 배우들이 영화계로 대거 진출할 때도 그는 수많은 출연 제의를 마다하고 ‘국립극장 지킴이’로 남았다.

“연극이 배우의 예술이라면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지요. 저는 기교나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연극으로부터 정직함을 배웠어요. 어떠한 ‘애드리브’도 없이 살아온 제 삶도 마찬가지예요. 연기인생 60년이지만 아직도 무대에 서면 떨리고 설렙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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