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정가일, '부부'

  • 입력 2003년 8월 31일 17시 30분


부부

-정기일

은사시나무가

온몸으로 비를 맞고 서 있다.

그 옆에 나도

온몸으로 비를 맞고 섰다.

그렇게 우리는

은사시나무가 되었다.

시집 '얼룩나비 술에 취하다'(종려나무)중에서

원앙이가 금실 좋다곤 해도 실상은 틈만 나면 바람을 피운단다. 그래 그런가? 신혼 방마다 나무원앙을 모시곤 하니 집집마다 거울 깨기 일쑤다(破鏡). ‘부부’라는 글자를 유심히 보니 두 팔 벌리고 선 두 그루 나무가 보인다. 동풍이 부는지 우듬지가 서쪽으로 기울어 있다. 눈 밝은 시인이 얼른 은사시나무라 귀띔해 준다. 하고많은 나무 중에 은사시나물까. 매미 울음소리에도 흔들리고, 논두렁 막걸리통에 앉았다 술 취한 얼룩나비 콧김에도 흔들린다. 연애시절 하해(河海) 같은 포용력은 간 데 없고 자잘한 일상에도 파르르 사시(斜視)가 되곤 한다.

그러나 나무는 쉽게 파트너를 갈아 치우지 않는다. 평생 한자리에서 여름과 겨울, 폭풍과 장마를 견딘다. 서로를 다 가려주려 욕심내지 않고, 각자 온몸으로 비를 맞으나 평생 동행하는 나무로부터 배운다. 내 옆에서 잠든 게 보드라운 은사시가 아니라 따가운 탱자나무일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당신”하고 호명해 보라.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신은 언제나 ‘당신’이니까.

반칠환 시인

이번 주부터 문화면 새 연재 ‘이 아침에 만나는 시’가 반칠환 시인의 해설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한 모금의 맑고 따사로운 시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요.

▼반칠환 시인약력 ▼

△1964 충북 청주 생 △1989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2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당선작 ‘갈 수 없는 그곳’ ‘가뭄’ △1999 대산문화재단 문학인 창작 지원 시 부문 선정 △ 2001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시와시학사) 출간 △2003 시집 ‘누나야’(시와시학사)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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