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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7일 16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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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무명 또는 항라로 된 홑겹의 속적삼을 입거나 가리개용 허리띠로 동여맸던 여성들의 가슴은 가문을 잇는 아들을 기르는 ‘어머니의 젖’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풍습은 일제 치하의 이른바 ‘근대(modernity)’를 겪으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주부들이 공공장소에서 가슴을 풀어 헤치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광경은 60년대까지도 드물지 않았다.
대중문화에 드러난 한국 여성의 가슴에 대한 인식의 변천을 살펴본다.
●상품화되는 가슴
95년 프랑스의 의사 도미니크 그로스는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의 가슴으로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팔 수 있다”고 말했다. 19세기 말부터 가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품의 광고에 가슴을 드러내거나 강조한 여성이 등장했다.
이런 추세는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산과 양육의 ‘가정적인 가슴’은 대량 생산과 마케팅의 시대에 ‘상품화된 가슴’으로 변했다.
1920년대 ‘중장탕’이라는 피부미용 및 건강보전식품 광고포스터에 비록 그림이긴 하지만 전라의 여성이 등장했다. 27년 잡지 ‘별건곤’에는 한 회사가 내걸었음직한 광고를 비웃는 만평이 실렸다. 나체의 여인이 가슴을 내놓고 옆으로 누워있는 그림을 본 아이가 엄마에게 “저거는 왜 막 발가벗고 누웠소?”라고 묻자 아이 엄마가 “다른 데로 가자. 망측스럽다”고 답한다.
35년 잡지 ‘조광’의 창간호에 실린 ‘모던 심청전’에는 심청의 어머니 곽씨 부인이 심청을 잉태하는 꿈을 꾸는 장면이 삽화로 처리됐다. 이 삽화에서는 심청을 점지해주는 사람이 삼신할미가 아니라 프랑스의 유명한 무희다. 가슴을 드러낸 반라의 무희가 부인병 특효약을 곽씨 부인에게 전달한다.
이 무희는 조세핀 베이커라는 실존 여성이었다. 그는 1920, 30년대 프랑스 파리의 뮤직홀 쇼에서 가슴을 드러낸 채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그를 모델로 한 상품 광고가 당시 국내 신문에 자주 실렸던 것이다.
물론 당시 현실에서 이런 나체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모던 걸’로 불리던 여성들의 패션에서 드러나는 노출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곤 했다.
1930년 7월 조선일보에는 가슴이 거의 드러난 상의를 입은 모던 걸에 대해 “1930년의 뻘거숭이는 결코 외설죄가 안 되는 모양?”이라며 야유하는 글이 실릴 정도였다.
●“애마에게 옷을 입혀라”
최초로 여성의 가슴이 노출된 우리 영화는 1957년 도금봉 주연의 ‘황진이’였다. 그러나 이는 치마 끈 위로 젖무덤이 약간 드러난 정도였다.
현대물로는 같은 해 윤인자가 주연한 ‘전후파’가 최초였다. 윤씨가 거품으로 가득 찬 욕조에서 목욕하는 장면에서 역시 젖무덤이 드러났다. 이 정도 노출만으로도 센세이션이었다. 영화연구가 정종화씨(61)는 “당시 남성들의 정신을 마비시킬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상품화된 가슴이 남성 시각에서 ‘성(性)의 신화’로 대중화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미국 할리우드도 ‘큰 유방만 써야 한다’가 불문율이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스웨터를 입어 큰 가슴의 실루엣을 드러내 남성들의 마음을 빼앗는, 마릴린 먼로로 대표되는 ‘스웨터 걸’이 유행이었다.
60년대 후반 미국과 서유럽의 여성해방운동은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면서 시작됐다.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사회적 기제에서 해방되겠다는 의미였다. 이때 클리프 리처드의 69년 이화여대 공연에서 열광한 여성들이 뭔가를 벗어 던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80년대 이후 한국 여성들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발점은 82년 영화 ‘애마부인’이었다. 주연 안소영이 전라로 말을 타는 장면을 멀리서 찍은 장면에서 관객들은 어렴풋이나마 가슴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이 영화 포스터의 카피는 ‘애마에게 옷을 입혀라’였다. 이후 여성의 가슴은 영화와 연극에서 넘쳐 났다.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의 가슴을 ‘남성 위주의 성(性)’으로 보는 모든 시도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크고 자연스러운 볼륨감을 제공하는 브라를 입는 것은 여성 자신의 미적인 바람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2003년 여름 한국에서는 인기 여가수의 가슴이 TV 쇼에서 보였네, 보이지 않았네 하는 것이 스포츠 신문의 주요 기사가 된다. 또 지하철 역사 안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엄마들이 지하철 안에서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이제 한국 여성의 가슴은 감춰지면서 동시에 드러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자료:‘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이상 현실문화연구) 등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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