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진 선생 영전에 부쳐 "우리시대 '큰광대' 편히 잠드소서"

  • 입력 2003년 7월 9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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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부음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에서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란 가슴을 한동안 진정할 길 없이, 선생님의 모습이 파노라마같이 스쳐 지나가며,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원장 잘 계신가”하면서 문을 밀고 들어오실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국악원에 나오시는 날이면 원장실부터 시작하여 여러 방을 두루 들르시면서 제자들의 안부를 묻고 격려하시던 인자하신 모습은 영원히 지울 수 없습니다. 지금도 가끔 국악사양성소 시절 선생님께 배웠던 판소리 ‘쑥대머리’를 응얼거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1962년에 국악원과 인연을 맺으면서부터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연속 판소리 완창이라는 금자탑을 이루시게 되었습니다. 종로구 운니동 국악원 시절이나 1967년 이후 장충동 시절에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곧바로 출근해서 연습만 하시는, 한마디로 ‘연습벌레’로 유명하셨습니다. 1968년 ‘흥부가’ 5시간 완창을 시작으로 판소리 5마당 전부를 완창무대에 올리셨고, 소리는 없어지고 가사만 전해지던 ‘숙영낭자전’ 등을 복원하시면서 잊혀져가던 판소리를 새롭게 각인시킴으로써 판소리 부흥의 기틀을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명창들이 완창 판소리를 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셨을 뿐 아니라 ‘충무공 이순신전’, ‘예수전’ 같은 새로운 판소리도 개척해 나가셨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판소리를 위해 사셨으며 자신이 세운 기록을 늘 경신하셨습니다. 그래서 ‘박동진’ 하면 판소리요, 판소리 하면 ‘박동진’이란 별명을 낳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부터 ‘박동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발표장은 초만원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판소리의 대중화를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관중의 분위기를 읽는 데 뛰어나셨습니다. 재미가 없는 듯 하면 귀가 번쩍 뜨이는 재미있는 ‘아니리’로 분위기를 반전시켜 놓는 재능이 천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대통령 앞에서 ‘흥부가’를 부를 때 심한 욕과 음담패설을 넣었더니 나중에 경호책임자가 불러 고의유무를 확인했던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습니다. 2001년에 국립국악원 개원 50주년 기념공연 ‘우리시대 예인의 무대’에서 좌중을 웃겨가며 ‘적벽가’를 힘 있게 부르시던 모습은 이제 생전의 마지막 모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것을 지키고 알렸던 우리 시대의 큰 별이자 큰 광대였던 박동진 선생님. 대 명창이신 선생님의 부음으로 우리 국악계는 큰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이제는 국악원과 함께했던 기억들을 고이 담아 보내드려야겠습니다. 선생님 평안히 잠드십시오.

윤미용 국립국악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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