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모임 '비빌언덕' 이끄는 대학강사 김진욱씨

  • 입력 2003년 3월 30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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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밤 서울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아버지 김진욱씨의 ‘사운드오브 뮤직’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김진욱씨와 딸 수연양. -전영한기자
28일밤 서울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아버지 김진욱씨의 ‘사운드오브 뮤직’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김진욱씨와 딸 수연양. -전영한기자
중동에서 이라크전쟁의 포화가 울린 지 일주일여 지난 28일 저녁. 서울 중구 장충동의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서는 ‘잔인한 전쟁(The cruel war)’ 등 반전(反戰) 노래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잠시 막간 후, 무대의 불이 꺼지자 이번에는 40대를 훌쩍 넘어선 한 중년 남성과 이제 막 10대에 들어선 그의 앳된 딸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아빠의 ‘사운드 오브 뮤직’ 기타 연주와 딸의 노래가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아빠 김진욱씨(47·연세대 강사)가 노래를 마친 뒤 “5년 전엔 아무것도 몰라 객석을 잘 쳐다보며 노래부르던 꼬마 수연이가 어느 새 초등학교 5학년이 됐다”며 “이젠 수줍음을 알게 됐는지 관객과 눈도 못 마주친다”고 말하자 이들의 오랜 친구와 가족이 포함된 관객 300여명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날 밤 행사는 김씨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노래패 ‘비빌 언덕’이 같은 장소에서 세 번째로 연 콘서트였다. 11명의 회원 중 9명이 이날 무대에 올랐다. 회원 중 절반이 40대를 훌쩍 넘긴 중년. 하지만 일부 회원은 자작곡을 만들어 음반을 냈을 정도로 ‘노래 사랑’이 남다르다. 실력도 수준급이어서 가수들의 공연에도 수없이 찬조 출연했을 정도.

그렇지만 노래가 생업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씨를 비롯해 모임의 최고 연장자인 숙명여대 윤경원 교수(48·여), 바이오벤처기업 듀플로젠 김진현 대표이사(47), 중소기업 솔빛기술 박상래 이사(40) 등 대부분의 회원은 각자 직업을 갖고 있다.

김씨는 “각자 바빠서 공연 한번 하려면 시간 맞추기조차 쉽지 않지만 워낙 서로 잘 알고 있어서 호흡을 맞추기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은 경동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제자로, 또는 선배와 후배로 만나 벌써 길게는 수십년째 세대를 뛰어넘어 우정을 나누는 사이. 처음에는 단순히 노래를 사랑해 모임을 시작했지만 점차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더 큰 목표를 갖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들에겐 공연도 ‘더불어 사는 삶’의 실천 방식이다. 입장료는 물론 공연 내용을 녹음한 CD 판매액 전액을 한국에서 일하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의료비로 지원해 왔다. 관객석에 유난히 외국인이 많은 것도 이 때문. ‘비빌 언덕’이란 이름도 ‘톱니바퀴처럼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힘들고 지친 영혼들이 와서 살을 비비며 쉬었다 가는 곳’이란 뜻이다.

김씨는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일에만 매달려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며 “어렵더라도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을 떼어내 나를 찾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천편일률적인 대중문화가 아닌 자신만의 놀이문화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을 때 ‘진정한 나’에게 눈뜨게 된다는 것.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대학 교양학부 수업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다. 대학생들에게 노래 악기 그림 글쓰기 등 다양한 문화적 활동을 통해 ‘나를 찾는 기회’를 가져보라는 뜻에서 ‘나찾기’라는 문화활동 소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김씨 역시 학창시절 다양한 ‘나찾기’에 몰두했고, 방황처럼 보이던 이 같은 경험은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같은 학교 영문학과로 옮겼던 그는 다시 미국 유학시절 뉴욕주립대에서 문화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지금은 모교에서 공통교양과목으로 ‘문화인류학’뿐 아니라 영문학과 사회학을 아우르는 ‘미국문화와 예술’ ‘미국학 특강’ ‘영상영어’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김씨는 “사회가 요구하는 획일성은 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억누르고 있다”며 “한 템포 느리게 자유를 누리는 여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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