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삶]독주회 위해 고국찾은 세계적 성악가 연광철

  • 입력 2003년 2월 23일 18시 57분


공고 출신으로 세계 정상의 베이스로 다시 태어난 연광철. 그는 60대까지 활약할 베이스로서 이제 “출발점에 섰을 뿐”이라고 말한다. -김미옥기자
공고 출신으로 세계 정상의 베이스로 다시 태어난 연광철. 그는 60대까지 활약할 베이스로서 이제 “출발점에 섰을 뿐”이라고 말한다. -김미옥기자
1983년 여름, 공업고 3학년생이던 연광철(延侊哲·38)은 삶의 쓴맛을 본다. 건축반 학생이던 그가 동기생 90% 량이 합격하는 건축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떨어진 것.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농사꾼 집안에서 3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로서는 앞길이 막막했다.

그때 그가 택한 길이 성악이었다. 집에 오디오 하나 없었고, 학교에서도 음악교사가 처음 부임한 3학년 때까지 음악수업이 없었다. 그가 피아노를 처음 본 것도 그해 9월 수소문해 찾아간 충주시내 피아노학원에서였다.

그런 그가 성악으로 대학에 가겠다고 하자 주변에선 다들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학교에서 오르간 건반 한번 눌러봤다가 “공고생이 무슨…” 하는 핀잔을 들었고 밤에 노래연습을 하다가 마을 어른들에게서 불호령을 들어야 했다.

그가 믿는 것은 고교 2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내 음악경연대회에서 ‘선구자’로 1등을 차지한 남다른 목소리뿐이었다.

그의 성역(聲域)은 베이스였지만 당시까지 베이스는 우리말 교칙본(실기용 곡목의 악보집)도 없었다. 개인레슨은 꿈도 꿀 형편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합창단원을 지낸 성악교습소 강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악보를 뗐다.

무대 위의 연광철. -동아일보 자료사진

그로부터 4개월 뒤 클래식 불모지나 다름없던 그의 모교에 첫 음대생이 탄생한다. 그가 청주대 음대에 합격한 것이다.

묵묵히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네 태몽이 지붕 위에서 잘 생긴 수탉이 우는 것이었다”면서 한 마리뿐이던 소를 팔아 등록금을 내줬다.

당초 그의 목표는 성악가가 아니라 음악교사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2학년 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교수가 그를 서울의 한 콩쿠르에 내보냈다. 베이스로서는 이례적인 1등. 얼떨떨해진 그는 자신을 더 확인해 보고 싶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각종 콩쿠르에 차례로 도전했다. 모두 2등이었다. 자신감이 쌓이는 한편 지방대 출신으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도 느꼈다. 자연스레 해외 유학이 떠올랐다. 때마침 80년대 말 동유럽과 수교가 이뤄졌다.

미국이나 유럽행을 꿈꿀 형편이 못 되는 그에겐 한줄기 햇살이었다. 아버지는 “네 사주가 외국을 제 집 드나들 듯이 살 팔자라더라”며 땅을 담보로 빚을 내 다시 학비를 쥐여 주었다.

그는 불가리아 소피아국립음악원을 거쳐 무대에 오를 기회가 더 많은 독일 베를린국립음대로 옮겼다. 93년 세계 3대 테너인 플라시도 도밍고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콩쿠르를 열었다. 500여명의 성악도 중에서 예선을 통해 유럽 8개 도시에서 4명씩 뽑아 프랑스 파리에서 최종 본선이 치러졌다. 연광철은 사실상 독일 대표를 뽑는 뮌헨 예선에서 낙마했다. 그러나 파리 본선에 나설 32명 중 1명이 병이 나 와일드카드로 본선에 합류했다. 도밍고는 그런 연광철을 4명의 우승자 중 한 명으로 뽑으며 “세계 오페라계에 보석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축복했다. 촌놈이 드디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바그너 음악축제인 바이로이트에서 그는 ‘탄호이저’의 헤르만 성주(城主) 역으로 독일 음악평론계의 황제라 불리는 요아힘 카이저로부터 “바그너가 찾던 바로 그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았다.

베를린 슈타츠오퍼 오페라단에서 활약 중인 그가 3월 9일 LG아트센터에서 독창회를 갖기 위해 최근 한국을 찾았다. 그에게서는 금의환향한 득의감보다는 잘 다듬어진 원숙함이 배어 나왔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고 다 실력일 수는 없어요. 오히려 부풀려지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꾸준하게 실력을 쌓아야죠. 60대까지 활약하는 베이스로서 저는 아직 시작일 뿐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베이스는 2m가 넘는 장대한 골격의 소유자가 많다. 오페라에서도 왕과 아버지, 할아버지처럼 중후장대한 역할이 많다.

170㎝의 단신인 그는 고무 코까지 붙여가며 그런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제가 깨달은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인정받은 것은 외모도 연기도 아닙니다. 오직 노래였어요.”

지금도 농사를 지으며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는 그의 부모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 이렇게 말한다. “얘야, 그 많은 외국말 가사 외우느라 힘들겠구나.”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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