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첫 완역 류의근 교수

  • 입력 2003년 1월 5일 18시 42분


류의근 교수
류의근 교수
현대철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의 ’지각의 현상학’이 류의근(柳義根·47) 신라대 철학과 교수에 의해 최근 한글로 처음 번역됐다. 원저가 나온 것은 1945년. 일본어로도 1974년 완역된 것에 비해서 한 세대 정도 늦은 감이 있다.

―’지각의 현상학’ 번역이 늦어진 이유는 뭔가.

”국내 현상학 연구에서 독일 철학자 연구가 주류를 이뤘고 프랑스 철학자 연구가 소홀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장 폴 사르트르에 비해서도 연구가 훨씬 부진했다. 한국전쟁 직후 암울하고 혼란한 상황에서 학구적인 메를로―퐁티가 대중적인 사르트르에 비해 인기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김형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철학), 오병남 서울대 교수(미학) 같은 분들이 메를로―퐁티를 연구하긴 했다. 하지만 김교수는 동양철학과의 만남이라는 본인의 연구에 초점을 맞췄고 오교수는 철학 고유의 입장보다 미학적이라는 응용된 관점에 치중해 기초적 연구를 위한 번역작업에는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지각의 현상학’을 번역한 계기는.

”1990년대초 부산과 서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서울대 한전숙(철학) 김홍우(정치학) 교수를 비롯해 몇몇 심리학과 교수들과 함께 메를로―퐁티의 주요한 첫 저서인 ’행동의 구조’(42년)를 함께 읽었다. 96년 경북대에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신체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약 5년에 걸쳐 그의 대표작인 ’지각의 현상학’을 번역했다. 앞으로 그의 유고인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64년)을 번역하는 작업에 전념할 것이다.”

―’지각의 현상학’의 철학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의식 일변도인 서양 철학의 눈길을 신체로 돌려놓은 저작이다. 그것은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철학의 자기 변형을 초래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 ’신체적 전환’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가 신체적 전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후설의 후기사상인 생활세계 현상학을 계승, 발전시킨 덕분이다. 메를로―퐁티가 벨기에 루뱅대학의 후설 문고를 방문해 미출간 원고들을 읽고 연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생활세계를 기술하는 현상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후설의 초기사상인 구성적 현상학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됐다.”

―그렇다면 오늘날 흔히 말하는 몸 철학이라 부를 수 있는가. 영미계통의 심신(心身)관계 철학과는 어떻게 다른가.

”제목부터 ’지각의 현상학’은 헤겔의 ’정신의 현상학’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각은 정신보다는 신체쪽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는 보통 지각이나 감각이라 하면 경험적인 것을 말한다. 영미계통의 심리철학 인지과학은 경험적인 연구에 치중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의 독창성은 신체의 선험성에 접근한데 있다. 신체기관은 경험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립적이지 않다. 거기에는 이미 선천적인 의미체계가 자리잡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와 함께 한국전쟁과도 관련이 깊다. 둘은 1930년 고등사범학교를 다니면서 만나 해방후 ’현대’지를 공동창간할 정도로 가까웠으나 한국전쟁에 대한 견해차로 헤어졌다.

파우스트처럼 학문을 섭렵한 후에 행동의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르트르는 미국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스탈린을 비판하지 않았다. 메를로―퐁티는 1955년 ’변증법의 모험’이란 책을 통해 사르트르의 정치적 실천을 비난했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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