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현장칼럼]미스월드대회 보이콧한 장유경씨

  • 입력 2002년 12월 19일 16시 37분


2002 미스코리아 선 장유경씨./신석교기자
2002 미스코리아 선 장유경씨./신석교기자
2002 미스코리아 선 장유경씨(19)를 11일 만났다. 미스월드 대회가 열리는 나이지리아로 지난달 9일 출국했던 장씨는 현지 이슬람 교도들의 유혈 폭동으로 8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인대회를 둘러싸고 분쟁이 시작된 만큼 도의상 책임을 지겠다”며 출전을 보이콧, 같은 달 25일 중도 귀국했다. 당초 함께 불참키로 했던 미스 미국, 영국 등 5명은 대회 개최지가 영국 런던으로 변경되자 태도를 바꿨으나 장씨는 유일하게 불참을 고집했다. 98년 미국으로 이민해 콜로라도주 스모키힐고교를 거쳐 같은 주 볼더주립대 생물학과에 작년 9월 입학한 장씨는 올해 연세대 생물학과 수시모집에 합격(일반전형)했다.

기자〓미인 대회를 왜 포기했나요?

유경〓웃으며 무대에 올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1등을 한다고 해도 그 명예는 수백명의 목숨과 맞바꾼 것 아니겠어요?

기자〓프로 권투선수 김득구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링에서 죽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프로정신이 부족한 것 아닙니까? 유경씨는 한국의 ‘양심’이 아닌 ‘미’의 대표로 출전했잖아요?

유경〓아무리 직업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인간에겐 윤리라는 게 있어요. 미인대회는 계속될 수 있어도 희생된 이의 목숨은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잖아요? 프로페셔널 이전에 인간성과 양심이 있는 것 아닐까요?

기자〓오히려 유경씨가 대회에 끝까지 참석하는 것이 여성에게 억압적인 이슬람권에 강력한 메시지를 주는 것 아니었을까요?

유경〓하지만 제가 보이콧함으로써 다만 몇 사람의 기억 속에라도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난 폭동의 의미를 남기고 뭔가를 생각토록 하잖아요. 종교문제와 희생이 이렇게 심각하구나 하고…. 2002년 미스월드 대회는 피와 폭동으로 얼룩졌다고 역사에 기록될 것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그런 대회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자〓어차피 안 될 것 같으니까 보이콧한 건 아닌가요?

유경〓천만에요. 자신 있었어요. 제 의견을 영어로 표현하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 서양애들이 갖고 있는 화려한 미는 없지만 지적이고 단아한 동양적인 미로 밀고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또 저의 외모에 대한 다른 참가자들의 의견도 굉장히 좋았어요. 자기들(다른 참가자들)은 대회에 참가하면서도 저에겐 “정말 멋지다. 잘한 결정이야”라며 내심 즐겼죠. 스포트라이트를 더 받기 위해서라면 끝까지 런던 대회에 참여했겠죠.

남녀공학인 서울 용강중학교 시절부터 장씨를 흠모하던 한 살 연하 후배는 이민간 장씨를 따라 미국까지 유학왔다. 장씨는 “배울 게 없는 관계는 생산적이지 못하다. 공부에 전념하겠다”며 구애를 거절했다. 장씨는 “세포기관, 세포, DNA로 생명체의 본질을 밝힐수록 ‘어떻게 생명이 탄생했을까’ 하는 실존적 벽에 부닥치는 것이 생물학의 매력”이라며 “생명을 파헤쳐 들어갈수록 신(神)의 영역은 되레 넓어진다”고 했다.

기자〓보이콧할 정도로 의식이 있다면 ‘여성을 상품화한다’고 비난받는 미스코리아대회는 왜 참가했나요?

유경〓간단히 말하죠. 미스코리아 대회를 둘러싸고는 누구도 죽지 않았어요. 대회가 있음으로 해서 개인적 피해를 본 사람도 없었고요. 제가 미스코리아 선이 되었기 때문에 피해 본 사람이 있나요?

기자〓많은 여성들이요. 미스코리아대회에 대해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여성들로 하여금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비판도 있죠.

유경〓수치심 이전에 여성의 기본 바탕에 있는 질투심 비슷한 감정 아닐까요?

기자〓하긴 미니스커트나 야한 차림의 여성을 가장 많이 쳐다보는 것은 남자가 아닌 여자죠. 본인은 그런 시선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유경〓굉장히 즐겨요. 나를 뾰족하게 보든 웃으면서 보든 간에 꾸미고 나간 저를 사람들이 눈여겨 보면 ‘내가 시선을 끌 만한 루킹(looking)이 되는구나. 오늘 성공했다’ 하고 기쁜 마음이 들죠. 저도 예쁜 여자를 보면 미워요. ‘눈이 정말 예쁘다. 머릿결이 예쁘다’면서 나도 모르게 쳐다보죠.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여성을 보았을 때도 질투하고 샘을 내죠. 하지만 ‘그러한 심리로 나도 쳐다보겠지’하고 생각하면 상황을 즐기게 돼요.

기자〓그건 유경씨가 아름다우니까 가능한 얘기죠.

유경〓아니죠.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셀프 컨피던스(self confidence·자신감)죠. ‘나는 나야. 저 애가 팔등신에 서울대 법대를 다닌다고 해도 나는 내 인생이 있어’ 하는…. 남의 잘난 점에 신경질 내기보단 ‘난 어떤 장점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자기를 아끼고 사랑해야죠.

장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나는 거인인 게 너무 싫다. 내 키에 맞는 친구도 없다. 내 얼굴은 왜 이럴까. 다른 애들은 하얗고 아담하고 귀엽고…. 왜 나는 덩치도 크고 얼굴도 까무잡잡할까.’ 열등감에 시달리던 장씨에게 어머니(송일미·45)는 “자신에 대한 불만이 표정과 말투로 나타나는 것”이라며 딸에 대한 ‘교정’을 시작했다. 바깥쪽 뒷부분만 집중적으로 닳은 장씨의 운동화 밑창이 균형있게 닳을 때까지 점검하며 “터벅터벅 걷지 말고 당당하게 걸어라”고 했다. 삐딱하게 사람을 쳐다보며 눈동자를 왔다갔다하는 버릇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아이 콘택트(eye contact·눈마주치기)하라. 눈빛도 부드럽게 풀어라”라고 했다. 부모님은 장씨에게 “너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자〓미인대회가 여성의 몸을 상품화한다는 건 사실 아닌가요?

유경〓100% 아니라고 할 수는 없죠. 각종 행사에 가면 함께 사진 찍으시는 남자 분들이 “보기 좋잖아. 예쁘잖아. 그림이 되잖아” 하면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죠.

기자〓그렇다면 미스코리아 폐지론도 일리가 있죠?

유경〓돋보기를 들이대면 비판받지 않을 게 세상에 뭐가 있겠어요. 나쁜 것은 늘 크게 보이니까…. 하지만 비판이 있으니 개선이 있는 거죠. 미스코리아도 학식과 같은 지적인 면의 비중을 높이고 있죠. 밉게 보이더라도 ‘그래, 여성들이 한 번쯤 도전해 볼 수 있는 꿈이다’하고 심플하게 생각해 주시면 안될까요?

기자〓하긴 예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듯, 똑똑한 사람도 있고 똑똑하지 못한 사람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IQ테스트나 수능도 폐지해야 하겠죠. ‘지능’이나 ‘지식’을 상품화하는 거니까….

유경〓그건 아니죠. 수능은 그 또래가 되면 예외 없이 거쳐가야 하는 관문이지만 미스코리아에 지원할 수 있는 여성은 1년에 60명뿐이거든요. 수적으로 적으면 다수의 타깃이 되기 쉽죠. 그러나 자신감 있는 분들은 남이야 어떻든 자기 스스로를 가꾸려 노력해요. 남을 비난하면서 자신도 함께 낮아지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기자〓예쁘면 머리가 나쁜가요?

유경〓기자님도 저와 만나 대화를 해보니 저를 진짜로 알게 되잖아요? 머리가 비어 보이나요?

기자〓아뇨. 전혀.

유경〓(웃음) 미스월드 대회가 출범하면서 내건 슬로건은 ‘뷰티 위드 펄퍼스(beauty with purpose·목적있는 아름다움)’였어요.

기자〓뷰티 위드 펄퍼스…. 그것을 실현한 게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아닐까요? 아프리카 기아 구제에 투신하며 만년을 보냈죠. 아름다움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죠.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매력적인 입술을 가지려면 친절하게 말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려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살펴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려면 배고픈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먹어라.…)”

유경〓오, 존경스러워요.

기자〓What are your beauty tips?(당신 아름다움의 비결은?)

유경〓Just being myself, being natural. Not trying to cover myself to others(내 자신을 잃지 않는 것. 자연스러운 것. 내 자신을 숨기지 않는 것).

다년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심사위원을 지냈던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장씨의 사진을 보고 “갸름한 얼굴이 매력적이다. 교양미가 흐르고 굉장히 차분한 분위기와 지성미가 느껴진다. 볼에 칙본(cheek bone·광대뼈)이 살짝 올라와 보이는 입체적인 얼굴이다”고 평가하며 “그러나 모자를 써 교양을 쌓은 지성적 풍모를 스스로 반감시킨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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