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계간지 겨울호 눈에띄는 특집

  • 입력 2002년 11월 24일 17시 42분



주요 학술계간지 겨울호들은 그동안 우리 학계와 지성인들이 정밀한 논전없이 ‘공리(公理)’처럼 받아들였던 사안에 대해 ‘이의(異意)’을 제기한 특집이 눈길을 끌었다.

‘황해문화’ 특집기고문중에서는 박태균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국사학)가 쓴 ‘실패한 통일의 신화들’이라는 글이 가장 논쟁적이다. 그는 김구 조봉암 장준하 김대중 등 평화통일의 실천에 나섰던 지도자들의 결과적인 실패와 사실상 반통일적이었던 이승만 박정희의 현실적 성공이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통일 문제에 대한 이율배반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했다.

박교수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정점에 올랐던 통일의 신화는 다시 한번 실패로 끝을 맺어가고 있다”며 “2000년 통일신화는 이전과는 달리 정권을 장악한 쪽에 의해 시도됐고 상당한 진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신화를 현실화하거나 통일(담론)을 통한 대중적인 리더십을 형성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역사비평’은 홍덕률 대구대 교수(사회학)의 ‘한국의 메인스트림은 누구인가’라는 글을 실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합리적인 메인스트림이 2002년 선거에서 새로운 판단을 해줄 것을 믿는다’는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말을 실마리로 삼아 한국의 주류(主流)는 과연 누구인지를 문제삼았다.

홍교수는 “과거에는 KS(경기고-서울대)출신과 재벌 등이 주류의 핵심층을 이뤘으나 93년 문민정부 출범과 97년 정권교체 이후 최소한 정치권에서는 기존의 주류-비주류간 세력교체가 진행중이며, 또한 정보화의 진전과 재벌개혁 등으로 사회경제적 주류-비주류의 분절선도 요동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회비평’의 특집 ‘학술권력과 글쓰기’는 교수들이 특정 글쓰기를 강요당하는 구조화된 현실을 비판했다. 장덕현 부산대 교수(문헌정보학)은 학술진흥재단의 SCI 인용빈도에 의한 학술지 평가사업이 학술담론의 생산과 유통에 개입함으로 창조성과 자율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인 장석주씨는 마광수 연세대 교수(국문학)의 재임용 탈락사건을 문제삼아 대학사회의 닫힌 글쓰기 문화를 비판했다. 그는 이 사건의 핵심을 ‘마교수의 자유주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글쓰기의 방식과 학술논문만을 중요 연구업적으로 인정하는 제도화된 학술권력의 경직된 평가기준이 정면으로 상충한 것’이라고 보았다.

‘비평’은 그동안 계간지에서 잘 다루지 않던 ‘내면성’이란 주제를 끄집어내 외면적 속도와 생산성에 매달려온 지식사회의 불구성을 들춰냈다. 최신한 한남대 교수(철학)가 다시 교양의 의미를 묻는 ‘내면성의 위기와 교양의 과제’를, 임채우 광운대 연구교수(철학)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입장에서 내면성을 다룬 ‘인간의 내면성에 대한 동양철학적 고찰’을, 이남호 고려대 교수(국문학)가 90년대 이후 작가들의 내면성 약화를 지적한 ‘전자시대의 문화적 성격과 내면성의 빈곤’이란 글을 실었다.

‘창작과 비평’은 논란많은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해 제3의 길을 제시한 건축가 김석철씨의 글을 실었다.

이밖에 ‘황해문화’는 올해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맞아 오인화 공정자 김용하씨 등이 공동으로 당시 이민 브로커인 데이비드 W 데쉴러의 모습을 찾는 작업을 했다. 하와이 이민사업은 1902년부터 하와이 사탕수수농장협회, 주한 미국공사관의 호레이스 알렌, 브로커 데쉴러 등 3자가 중심이 돼 추진된 사업이었는데 알렌과 달리 데쉴러의 모습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문학과 사회’는 연속 기획 ‘21세기 문화, 낯선 인간속으로’에서 만화와 판타지문학속의 괴물이야기를 다뤘다.

한편 일상적 파시즘 논쟁을 제기해 관심을 끌었던 ‘당대비평’은 경제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발간을 중단했다. ‘당대비평’은 내년 봄호부터 나남출판에서 내는 ‘비평’과 합쳐진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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