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섹스&젠더]뷰티풀 마인드

  • 입력 2002년 11월 7일 17시 42분


이번에 만난 3명의 인터뷰 대상자들은 불가피하게 ‘섹스리스(sexless)’부부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백에는 인간의 본능과 이성이 교차하며 만나는 접점이 있다. 나는 그것을 ‘아름다운 마음(뷰티풀 마인드)’이라고 불러보고 싶다.

1. 장면 하나

영화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혼자 영화관에 갔다.

영화를 보고난 뒤, 서울 시내를 정처없이 운전하고 다녔다.

내내 울었다.

그리고 아이들 아빠를 많이 생각했다.

그에게 전화도 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은 그냥 잊었거나 스쳐지나갔을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영화 속 아내가 섹스를 요구하자 남편은 돌아누웠다.

아내가 “약 때문이냐”고 묻자 남편은 “그렇다”고 답했다.

아내는 잠옷차림으로 목욕탕에 가 거울을 깨뜨리며 울었다.

난 기적을 믿는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찾는 인간의 의지를 존중한다.

몇년전 아이들 아빠가 불의의 사고로 머리를 다쳤다. 의사는 내게 진료실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한 뒤 그와 단둘이 섹스능력에 대해 한참 동안 면담했다.

환자들은 재활과정에서 절망과 희망 속을 끊임없이 오간다.

이 때 가족, 특히 배우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특히 남자환자의 경우 섹스를 두려워하게 된다.

영화는 아내의 도움으로 정신분열증을 극복하고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수학자 존 포브스 내시의 일생을 그렸다.

영화 제목처럼 ‘뷰티풀 마인드’야말로 한없이 사랑하는 데도 섹스할 수 없는 부부를 지탱해주는 힘이 아닐까.(30대 여성)

2. 장면 둘

아내의 배가 점점 불러온다.

임신 후기로 접어든 아내는 한밤 중에 잠을 깨기 일쑤다. 커진 배가 위를 압박해 소화가 잘 안 되고, 피부의 수분 부족으로 몸이 가렵다고 호소한다.

몸이 마르고 허약한 아내는 둘째 아이를 갖기 위해 용하기로 소문난 한의원을 찾아다니며 지극히도 공을 들였다.

10kg 이상 체중이 늘어나 펭귄을 연상시키는 아내는 여전히 내게 너무 사랑스럽다.

그러나 내 몸이 섹스를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올 때면 난감해진다.

한 친구는 “얘야, 굶으면 안 된다”며 직업여성과의 ‘원나잇 스탠드’를 권했다. 섹스는 코미디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다른 여자와의 교감없는 섹스로 인해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는 것은 아니라고 어깨를 다독였다.

한 친구는 아내의 임신 중 피트니스클럽을 열심히 다니며 운동하는 것으로 잡념을 떨치고 건강을 유지했다고 했다.

한 친구는 임신한 아내로부터 정기적으로 오럴섹스를 받는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한 이후인 4년전부터 우리 부부는 사실상 섹스리스 생활을 하고 있다. 첫아이의 임신과 출산, 전쟁같은 육아 등으로 아내와의 무드있는 섹스는 기억에조차 남아있지 않다.

얼마전 아내의 오럴섹스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아내 앞에서 자위를 했다. 그러나 몸이 둔해진 아내는 내게 관심도 두지 않고 옆에서 숨을 헐떡이며 발톱을 깎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배가 불러서 발톱도 못 깎겠네.”

체념은 빠를수록 좋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큰 소리로 틀어놓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호흡은 가빠지며 손바닥은 얼얼해왔다.

‘그래, 조금만 참자.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배설이 아니다.’(30대 남성)

3. 장면 셋

대학 졸업 후 결혼과 동시에 시작한 외국 유학생활은 단란하고 행복했다. 그 때 우리에게는 수많은 꿈이 있었다. 남편은 드라마 연출가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됐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 우리 부부의 실제 이야기가 됐다. 우리는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남편과 나는 신앙으로 슬픔을 극복했다. 남편은 지금 교회와 사회봉사단체에서 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고 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섹스 생각이 날 때도 있음을 고백한다. 나는 남편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과 몸을 연신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그럴 때면 남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환하게 담는다. 온갖 세상의 상념들이 물수제비처럼 하염없는 동그라미를 만들며 흩어진다.

부부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서,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일상이 피곤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섹스하지 않는 커플들에게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해주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부러운 축복이라고. (30대 여성)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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