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한국 미술현장 진단 2]'검은 거래'에 찌든 거리조형물

  • 입력 2002년 9월 1일 17시 45분


비슷비슷  서울 시내에 있는 거리 조형물들. 서울엔 이와 흡사한 모양의 조형물들이 상당수 설치돼있다.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비슷비슷 서울 시내에 있는 거리 조형물들. 서울엔 이와 흡사한 모양의 조형물들이 상당수 설치돼있다.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②외면받는 거리의 공공조형물

“건축물을 지을 때마다 건물 밖 거리엔 쉼없이 조각물이 세워지지만 볼만한 것은 거의 없다. 모양도 패턴도 비슷해 그게 그것같다. 예술품이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수준 이하가 대부분이다. 거리의 미관을 살리는 조형물이 아니라 아예 공해다.”

거리 조형물 제작에 참여했던 한 조각가의 고백이자 자기반성이다.

▼관련기사▼

- ①경매와 한국미술

1984년 서울시에서 처음 시행한 건축물 미술장식 제도는 1995년부터 전국적으로 의무화됐다. 연면적 1만㎡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때엔 건축비의 0.1∼1% 내에서 건축 미술품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건축물 미술품 중 문제가 심각한 것은 건물 외관에 설치하는 거리조형물(일명 환경조각). 거리조형물이 왜 이렇게 도시의 흉물로 전락한 것일까.

도시의 활력소 최근 서울 종로구 신문로 흥국생명 빌딩 앞에 설치된 미국 작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철제조각 ‘망치질하는 사람’(높이 22m). 노동하는 현대인의 고독을 상징하는 이 작품은 근래 서울에 설치된 거리조형물 중 최고작의 하나로 꼽힌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거리조형물 설치 과정과 현황〓우선 건축주가 작가와 작품을 선정해 지방자치단체에 심의를 올린다. 작가를 선정하는 일은 건축주의 권한이다. 자치단체 심의위원회(대부분 미술 관련 인사로 구성)는 심의에 올라온 작품이 예술성이 높은지, 건축물과 주변 경관에 어울리는지 등을 심사해 설치 여부를 결정한다.

서울시의 경우 매년 평균 200여건의 건축물 미술품(실내 미술 포함)이 승인을 받는다. 2001년엔 325건 중 223건이 심의를 통과했다. 이 중 약 60%가 거리조형물이다. 1984년 이후 서울시에 들어선 거리조형물은 약 1400여점. 한 점당 설치비는 대략 1억원 정도.

▽왜 거리조형물인가〓개인 소유의 건축물 앞에 조형물을 설치하라 말라를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술 및 건축 전문가들은 “건축물 자체도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공 환경이다. 따라서 도시 경관을 개선하고 사람들에게 심미적 정서적 풍요로움을 제공하기 위해 미술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거리조형물은 보기 싫어도 봐야하기 때문에 보다 공익적이며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천편일률적이고 수준 낮은 거리조형물〓작품성이 떨어지고 건물이나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조형물이 많다. 형태도 비슷비슷하다. 원이나 반원 혹은 호(弧)를 모티브로 삼은 조각, 어깨동무하고 있는 가족을 형상화한 조각물이 상당수다. 다른 작품들을 모방한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서울의 거리를 걷다보면 유사한 조형물을 한 블록마다 한 두 개 정도는 만난다. 충남 부여의 국립부여박물관 앞에도 원형 조각물이 설치돼 있는데 박물관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작품도 적지 않다.

▽브로커의 개입과 리베이트 관행〓건축주가 작가를 직접 선정하기도 하지만 중개상(브로커)이나 화랑이 개입하는 경우가 전체의 60%를 넘는다는 것이 미술계의 공공연한 비밀. 브로커는 건축주 관계자나 심사위원에게 로비를 하거나 리베이트를 제공하고 대신 중개료를 챙긴다.

올해 초 경기도의 한 쇼핑센터에 거리조형물을 설치한 박모씨는 “소개해준 컨설팅회사가 설치비의 40%를 중개료로 가져갔다”면서 “40%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고 대부분 중개료가 설치비의 절반이 넘는다”고 말했다. 최병식 경희대 교수는 “브로커가 떼가고 리베이트로 제공하고 나면 작가에게 돌아오는 돈은 20∼30%니 질 높은 작품이 나올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2000년엔 서울시 심사위원이었던 중견 조각가 이모씨는 리베이트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10억원 상당의 조형물 설치를 따냈다가 구속됐다. 화랑을 경영하는 이모씨는 조각가들을 중개해주고 설치비의 40%인 5억여원을 받고 세금을 포탈했다 구속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좋은 작품이 나올 수가 없다. 또한 브로커와 친한 작가들이 선정 기회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작품이 비슷비슷해지는 이유는 이런 데서도 비롯된다.

▽심사 강화의 필요성〓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심사가 강화되어야 한다. 심사는 대부분 실제 작품이 아니라 모형을 놓고 이뤄진다. 그러나 모형과 실물은 다르다. 따라서 현장 실사를 통해 철저히 심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교수는 “어느 지역의 전체적인 경관이나 역사 등을 고려해 어떤 조형물이 필요한지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고 이를 바탕으로 거리조형물을 심의하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브로커와 손잡은 일부 작가들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1년 단위로 설치 참여 회수와 총 액수를 제한하고 심사위원도 미술인 중심에서 벗어나 환경 건축 역사 전문가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조각가들의 발상 전환의 필요성〓한 조각가는 “회화 작가에 비해 작품이 별로 팔리지 않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서라도 거리조형물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작가들이 최소한의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수준 낮은 모방 작품을 양산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전에 제작한 조각품의 모형을 건축주에게 제출하는 경우도 있다. 새 건축물이나 주변 경관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신문로 흥국생명 빌딩 앞엔 미국 작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조각 ‘망치질하는 사람’(높이 22m)이 들어섰다. 철을 이용해 노동하는 현대인의 고독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참신한 거리조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법적 의무사항과 관계없이 별도로 작품을 들여와 설치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한 큐레이터는 자조적이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한국에서 심사를 했으면 이 작품은 아마 떨어졌을 것”이라고.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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