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親 耕(친경)

  • 입력 2002년 5월 14일 18시 15분


親 耕(친경)

耕-밭갈 경 奉-받들 봉 稷-곡식신 직 闡-밝힐 천 籍-문서 적 影-그림자 영

사람이 살아가는 데 衣食住(의식주) 세 가지를 두어 三要素(삼요소)라고 이름 붙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먹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과연 역사를 보면 王朝의 興亡盛衰(흥망성쇠)와 治亂(치란)의 자취는 모두 먹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民以食爲天’(민이식위천·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김)이나 ‘國以糧爲重’(국이량위중·나라는 양식이 무엇보다 중요함)은 결코 허황된 口號(구호)가 아니었다.

農耕民族(농경민족)이라면 먹는 것을 해결해 주는 땅과 곡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이 두 神을 奉祀(봉사)하는 社稷壇(사직단)은 宗廟(종묘)와 함께 王宮에 앞서 營造(영조)되어야 할 국가의 양대 기간시설이었다.

중국신화에 의하면 農事를 發明한 이는 神農氏(신농씨)이며 뛰어난 농사기술로 人類를 이롭게 한 이는 舜(순)임금 때의 農林장관 后稷(후직)이다. 물론 先農壇(선농단)을 두어 이 두 神을 섬겼으며, 漢文帝는 農事를 ‘天下之大本’이라고 규정함으로써 王政에서 최대의 盛事임을 闡明(천명)하였다. 자연히 이 때부터 農事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는 商業이나 工業은 末技(말기)로 천시되어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서열이 확립되게 된다.

우리 역시 농경국가였던 만큼 농사에 대한 이런 관념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나라는 百姓으로 근본을 삼고, 百姓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법인데, 農事라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서 帝王의 政治에서 먼저 힘써야 할 부분이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農者衣食之源, 而王政之所先也.) 世宗大王의 말씀이다.

자연히 제왕은 農事의 중요성을 백성에게 알리고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역대 중국의 천자들은 周나라 때부터 籍田(적전)을 두어 매년 季春(계춘)의 吉日을 잡아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았으니 이를 親耕이라 했다.

親耕의 풍습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高麗 成宗2년(983)부터 실시했다고 高麗史(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오면 더욱 구체화, 정례화 되는데 현재 동대문구 용두동에 先農壇을 마련하여 先農祭를 올린 다음 바로 남쪽에 위치한 籍田에서 親耕함으로써 勸農(권농)을 도모했던 것이다.

親耕의식은 純宗이후 일제 강점기에 폐지되었다가 광복 후 勸農日로 부활했으며 3공화국 이후부터는 대통령이 관민합동 모내기를 하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지금 고위층 인사들이 모심기 시범을 보이는 것은 그 殘影(잔영)이라 하겠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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