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회철학을 어떻게 소화? '한국 사회철학의 수용과…'

  • 입력 2002년 4월 5일 17시 38분


◇한국 사회철학의 수용과 전개/김재현 지음/317쪽/1만2000원/ 동녘

1933년 발간된 한국 최초의 철학연구 저널인 ‘철학’을 기점으로 하면, 이 땅에 서양철학이 수용되고 연구된 지 무려 70년이 지났다. 이 책은 백종현 교수(서울대)의 ‘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철학과현실사·1998)과 더불어 서양철학 수용과 전개의 70년사를 총괄적으로 다룬 또 하나의 저서로 기록될 것이다.

이 책 전체를 일관하면서 저류로 흐르고 있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한 마디로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다. 경남대 교수(철학)인 저자가 현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철학함’의 최대 화두로 삼은 발단은 평범한 사람조차 투사로 만들던 1970, 80년대의 엄혹하고 척박했던 시대현실과 관련돼 있다. 이 책이 198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 10여 년 동안 외부의 요구에 따라 썼던 글들 중 일부를 모은 것임에도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저자의 치열한 탐구정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땅의 현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반드시 서양철학의 수용사에 대한 연구를 통과의례처럼 거쳐야만 가능한 것일까? 적어도 저자는 서양철학의 수용사에 대한 연구검토가 현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위한 직접적 단서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 토대와 뿌리를 이룰 수밖에 없다는 방법론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저자가 한국의 서양철학 수용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결국 지금 이곳의 역사적 상황과 정신적 상황을 보다 체계적 종합적으로 인식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저자는 간고한 20세기의 역사 속에서 현실에 관심을 지닌 선배 철학자들의 고민을 스스로에게 투사하면서 온갖 자료를 섭렵하며 그들이 어떻게 서양철학을 소화하고 현실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꼼꼼히 검토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제1부의 부제인 ‘일제하부터 1990년대까지,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으로’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철학 가운데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수용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사회철학과 거의 동일하게 취급될 정도로 실천철학의 전형이었다. 이 때문에 그것은 그 어떤 다른 서양철학 조류보다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변혁적 전망을 풍부하게 내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4장과 5장은 이 책의 다른 글들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개념과 분석 틀을 통해 한국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하고 있는 글로 당시 저자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시기적으로 맨 먼저 쓰여진 1부 3장은 저자가 서양철학 수용사 연구에 착수하게 된 동기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초기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수용사에서 거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신남철 연구를 통해 일제하와 해방 직후 한 지식인의 이론적 실천적 고민, 나아가서 마르크스 수용의 한국적 특징을 고찰한다. 2장, 6장의 일부, 7장에서 나타나듯이 저자의 이런 관심은 개별 사상가를 넘어서 분단 이후 남북한의 마르크스 수용사를 총체적으로 검토하는 단계로 발전한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넓게 보면 해방 이후 북한의 마르크스 수용사의 한 양태로 볼 수 있다. 주체사상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적 토대로부터 출발해서 이와 대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수용사에만 머물지 않고 90년대 후반부터 서양철학 전반에 걸쳐, 그것도 남북한의 서양철학 수용사를 포괄하며 관심의 폭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2부 1장은 저자가 최근 한국 철학계의 태두인 박종홍 연구에 몰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나아가 저자는 책 머리에서 동아시아의 서양철학 수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하고 있는데, 이는 장차 저자의 연구가 동양 3국의 서양철학 수용사에 대한 비교검토까지 확대될 것임을 예고해 준다. 2부 2장과 3장에서는 한국사회의 대표적 실천적 지성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고 있어 서양철학의 수용뿐 아니라 한국사상사 전반에 대한 저자의 폭 넓은 관심이 잘 드러난다.

이 책은 기존의 몇 안 되는 서양철학 수용 관련 논문들이 빠뜨리고 있는 철학사상의 역사적 연관성에 대한 고찰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서양철학의 수용과 전개를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시켜 분석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한국사회의 역사적 상황과 철학의 변화 과정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는 한국사회에 대한 철학적 분석과 전망을 내놓을 수 없다는 저자의 판단 때문이다. 이런 탓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서양철학의 수용과 전개의 역사는 순수 학술사와는 다른 ‘사상사’에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이로 인해 이 책은 서양철학 수용사에 관한 기초자료를 광범하게 섭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접 사회과학 및 문학의 연구성과도 충실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는 섣부른 평가를 자제하고 관련 자료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보다 충실하려는 저자의 연구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20세기 한국철학사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에게는 이 책에 인용돼 있는 숱한 문헌들만으로도 충분한 정보가치가 있을 정도다. 또한 저자가 전공영역인 사회철학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과학이나 기타 다른 분야의 연구성과들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 현실에 토대를 둔 철학적 연구를 중시한 저자의 문제의식 때문일 것이다.

한국사회의 구체적 현실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전망하는 데 서양철학 수용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대해 깊게 공감한다. 하지만 서양철학 수용사 못지 않게,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전통철학의 현재적 유효성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싶다. 최근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 채 수입된 서양학문의 권위에 기생하는 우리 학문의 서구추종적 자세를 비판하는 글들이 빈번한 편이다. 그러나 서구추종적인 우리의 학문풍토를 비판하고 있는 주장들도 이 땅의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이론적 실천적 고민을 통한 독자적 지식생산 기반을 갖추지 못한다면, ‘오도된 자기성찰’이나 ‘지적 오만’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전통은 단지 지나간 과거의 것이 아니라 서구 문화가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오늘날에도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주고 인간관계와 도덕적 정서에서 힘을 발휘하는 삶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서구근대적 세계관과 가치관은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 사고와 실천의 동력을 상실했다는 소리도 들리고 있다. 한국현실의 문제점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새로운 전망을 열기 위해, 전통철학과의 대면은 ‘20세기 서양철학 수용사의 전통’보다도 더욱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병 수 경기대 강사·철학 lbs76@now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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