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燕 雀 鴻 鵠(연작홍혹)

  • 입력 2002년 2월 7일 17시 29분


燕 雀 鴻 鵠(연작홍혹)

燕-제비 연 雀-참새 작 鴻-기러기 홍 蒼-푸를 창 抱-안을 포 斬-목벨 참

흔히 ‘次元(차원)이 다르다’는 말을 한다. 기러기나 고니는 그 큰 몸집으로 훨훨 높은 蒼空(창공)을 날아다닌다. 그래서 두 놈은 예로부터 ‘君子’ 의 상징이었다. 반면 제비나 참새는 기껏해야 땅 위를 스치듯 말며 모기 따위의 보잘것없는 벌레나 잡아먹고 산다. 그러니 그들이 9만리 蒼空을 나는 기러기나 고니의 드높은 氣像(기상)을 알기나 하랴.

陳勝(진승·字 涉)은 秦(진)나라 말기 한 부자집의 일개 머슴이었다. 하루는 밭을 갈다가 잠시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얼마나 고달프고 답답했던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탄식이 나왔다.

“장차 큰 인물이 되면 결코 오늘을 잊지 않으리라!” 그러자 주위의 머슴들이 일제히 비웃고 나섰다.

“뭣이라고? 머슴 주제에 큰 인물이 되겠다고?”

그러자 陳勝이 말했다.

“제비나 참새 같은 작은 새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의 웅대한 抱負(포부)를 알랴!”

秦始皇(진시황)이 죽고 아들 二世(이세)가 다스리게 되었지만 포악함과 사치는 아버지를 능가했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쉽사리 불평 할 수도 없었다. 발각되면 族刑(족형·삼족을 멸하는 형벌)에 처해지기 때문이었다.

후에 陳勝은 吳廣(오광)과 함께 징발되어 漁陽(어양·현 河北省 密雲)의 長城(장성)을 수비하러 일행 900 명과 함께 가던 차에 大澤(대택·현 安徽省 宿縣)이란 곳에서 징병관을 죽이고는 군중을 모아놓고 말했다.

“어차피 늦었으므로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해도 죽게 된다. 설사 죽지 않는다고 해도 長城을 지키던 병사들은 10중 6, 7은 죽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대장부답게 이름이나 날리자. 王侯將相(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을쏘냐!”

다들 “와!”하고 호응해 왔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파죽지세로 주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었음은 물론이다. 마침내 陳勝은 국호를 張楚(장초)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중국 최초의, 아니 세계사상 최초의 대규모 농민봉기였던 것이다. 후에 司馬遷(사마천)은 그의 업적을 높이 기려 당당히 史記(사기)에서 諸侯(제후)의 반열에 올려 기록함으로써 농민의 저항권을 인정했다.

이 때부터 燕雀은 ‘소인배’, 鴻鵠은 ‘君子’를 뜻하게 되었다. 일부에서 鴻鵠을 ‘홍곡’으로 발음하는데 鵠이 ‘과녁’을 뜻하는 경우(正鵠·鵠的 등)가 아니면 ‘혹’으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밝힌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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