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연재 '한국사 새로보기'시리즈에 제기된 반론들

  • 입력 2001년 8월 28일 18시 16분


《본보 기획시리즈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는 지난 4월2일자부터 8월18일자까지 총 20회에 걸쳐 우리 역사의 다양한 쟁점들을 조목조목 짚어 매 주말마다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 '한국사 새로보기'기사 리스트

신 교수는 4월2일자 ‘우리 민족이 단일 민족이 아니다’편에서부터 8월11일자 ‘미국이 한반도의 4대국 분할을 시도했다’편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전반에 걸쳐 기존의 상식을 깨는 새 이론을 제시했다. 때마침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 속에서 이 시리즈는 우리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신 교수의 역사해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나 독자들도 있었다. ‘화랑은 원래 여자였다’(4월7일자) ‘최만리는 역사의 죄인인가’(4월21일자) ‘명성황후의 사진은 없었다’(7월7일자) ‘3·1운동’(8월4일자) 등 많은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글이 게재됐을 때 학계와 관련 당사자 후손들의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한국사 새로 보기’를 마치면서 이 시리즈가 연재되는 동안 제기됐던 반론들을 정리한다. 이를 통해 우리 역사학에 대한 활발한 토론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기대해본다.

‘3·1운동’ 편의 경우 후손들이 생존해 있는 점을 감안해 이들의 입장을 별도로 싣는다. 후손들의 입장은 민족대표 33인의 후손들로 구성된 ‘33인 유족회’가 보내온 것이다.》

▽화랑은 원래 여자였다(4월7일자)〓신 교수가 주장한 근거는 ‘삼국유사’에 화랑이 한자로 ‘花郞’이 아니라 ‘花娘’(郞은 남자, 娘은 여자의 뜻)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

그러나 이 글이 나가자 여러 학자들은 화랑이 ‘花娘’으로 표기된 것은 오자(誤字)였다고 지적했다. 같은 ‘삼국유사’에서도 그 다음에 나오는 화랑의 대목에 ‘花郞’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花娘’은 ‘花郞’의 오자가 분명하다는 논리였다.

◆ "조선시대에도 '花娘'이라고 써"

그러나 신 교수는 오자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삼국유사’의 다른 곳에서도 ‘花娘’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으며(권2 桃花女條), 조선시대에도 ‘花娘’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성종실록 3년 7월 10일자 예조의 상소) 등을 들었다.

일본인으로서 화랑을 연구한 미시나 아키히데도 여성으로서 ‘花娘의 시대’가 분명 있었음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원로 역사학자 이기백 전 한림대 교수는 “관창(官倉)이나 사다함(斯多含) 등 화랑으로 공업을 이룬 영웅들의 행적을 부인하는 뜻으로 이 글을 썼다면 잘못된 논리”라고 밝혔다.

▽첨성대는 제단이었다(4월14일자)〓신 교수의 이 같은 주장이 나가자 천문학계를 중심으로 많은 학자들이 첨성대는 천문을 관측했던 장소였거나 최소한 천문 관측과 관련된 축조물이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선 이들은 첨성대의 위치가 천문 관측을 위한 적지(適地)임을 역설했다. 우선 궁궐에서 가까워 천문 현상에 특이한 점이 발생하면 국가를 통치하던 왕이나 신하들에게 즉각 알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언제든지 관측 전문가가 천문 관련 정보를 신속하게 알려줌으로써 천변(天變)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에 대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 관측에 관한 기록이 첨성대 건립 이후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첨성대 건립을 전후해 국가적 지원 아래 본격적인 천체 관측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음을 보여준다고 이들은 지적했다.

◆"최만리 한글 반대한 보수파 분명"

▽최만리는 역사의 죄인인가(4월21일자)〓신 교수는 최만리의 행적으로 볼 때 무능하거나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의 상소 첫머리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업적을 ‘지극히 신묘하다’고 하는 등 칭송했으므로 한글 창제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상소 첫머리에 ‘지극히 신묘하다’고 칭송한 것은 단순한 수사였으며 바로 다음에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왜 창조하시나이까’라고 하는 표현이 뒤따른다”며 최만리의 한글창제 반대 입장은 분명했다고 밝혔다.

이 학자들은 또 “최만리 개인의 무능을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당시 그는 한글창제에 반대한 정치·학문 세력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그런 보수세력의 시대인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만리 등 보수세력에게 한글창제는 한문에 대항해 중국과 별개의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명성황후 사진은 없다(7월7일자)〓현재까지 나온 명성황후의 얼굴사진으로 가장 설득력을 갖는 것은 1895년을 전후해 청일전쟁 종군특파원으로 활동한 프랑스 언론인 빌탈 드 라게리의 저서 ‘한국, 독립할 것인가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인가’에 들어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신 교수는 이 사진을 정밀하게 확대해 보면 사진이 아니라 펜화임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신교수는 드 라게리가 이 책을 출판할 당시인 1898년에는 이미 명성황후가 시해된 다음이어서 사진이 진짜일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 사진을 삽화로 인쇄했을 가능성

그러나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김준희 전 건국대 교수(정치학)는 드 라게리가 1895년 3월 제물포항에 도착해 약 1년 간 체류했다고 밝히면서 그 근거로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자세한 내용을 최근 공개했다.

김 전 교수는 “저자가 서문에서 이 책에 실린 삽화들은 사진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어 명성황후 얼굴이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사진사연구소 최인진 소장은 “당시 기술수준으로 사진을 바로 인쇄할 수 없어 사진을 삽화로 그려 인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윤정국기자>jkyoon@donga.com

■'3·1운동'편에 대한 '33인의 유족회'입장 ■

2001년 8월4일자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3·1 운동 편은 사실과 다른 점을 기술함으로써 ‘33인 유족회’에 많은 아픔을 주었다.

첫째, 글의 표제어에서 ‘3·1 운동은 민족 대표 33인의 거사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3·1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민족대표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비하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했다. 역사의 주체가 그 시대의 지도자인지 아니면 민중인지의 문제는 사관의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민족운동사를 전적으로 민중운동만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균형 있는 역사서술이 아니다. 지도층의 발화(發火)가 없는 자연발생적 민중 운동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연행 이후에도 독립 소원의 지조를 지킨 이는 극히 일부분’이라는 대목과 지조를 지킨 분으로 한용운과 양한묵만을 지칭한 것은 여타의 모든 분들이 변절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독립선언서에서 서명하고 약속장소에 나갈 때 민족 대표의 각오는 죽음을 무릅쓴 것이었고, 문초과정에서 독립 정신을 지킨 분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셋째,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네 분이 마치 현장 도피의 성격을 갖는 것처럼 기록된 것은 사실과 다르다. 태화관에 참석하지 않은 네 분은 각자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하기 위한 책무가 있었기 때문에 다소 늦었거나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넷째, 약속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것은 민족 대표가 파고다집회에 참석할 경우 흥분한 청년들이 일본경찰과 충돌함으로써 유혈 사태가 일어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약속장소가 이완용의 별장이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친일적 장소에서 민족정기를 표현하는 것이 더욱 의미 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본문의 삽화에 기생들이 시중드는 장면을 그린 것은 애국정신을 훼손한 것이다. 태화관에 참석한 열두 분의 목사님들은 음식이 나오자 민족을 위한 기도를 올렸고 기생의 시중을 받지 않았다. 그 당시의 분위기는 너무도 엄숙하여 차려놓은 음식조차 들지 못할 정도였다.

(33인 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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