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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5월 27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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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의 고의적이고 조직적인 대량학살로 농민군 5만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일본학자가 밝혀냈다.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대 교수는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 107주년을 맞아 6월1, 2일 전주 코아리베라호텔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이노우에 교수는 발표문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학살’에서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산하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동학농민군 진압 관계 사료를 발굴 조사한 결과를 근거로 일본군의 학살행위를 고발한다.
이노우에 교수는 우선 1894년 10월27일 일본군 총지휘부인 히로시마 대본영으로부터 내려진 ‘살육’ 명령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일본군의 작전일지에 ‘동학당(東學黨)에 대한 처치는 엄렬(嚴烈)을 요함. 향후 모조리 살육할 것’이라고 기록돼 있고, 인천에 있던 병참사령부의 기록에는 ‘참살을 실행하라’고 돼 있다”고 말한다.
이는 동학농민군의 대량 희생이 전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조직적 학살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이며 이 사건은 일본군이 동아시아에서 저지른 최초의 대량학살이라는게 이노우에 교수의 주장이다.
또한 당시 조선정부의 사법권 아래 놓여 있던 동학농민에 대해 일본군이 ‘살육’ 또는 ‘참살’ 명령을 내린 것은 근대 국제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는 “사료를 보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동학농민군은 부상자를 포함해 30만∼40만 명에 이르며, 그 중 일본군에 학살 당한 농민군 숫자는 5만명 이상된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추산은 일본측 사료를 근거로 밝혀낸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한편 ‘갑오농민전쟁과 일본:조선왕궁점령사건 및 그 이후의 일본’을 주제로 발표하는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일본 나라(奈良)여대 명예교수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최초의 무력행사였던 조선왕궁 점령사건(1894년 7월23일)이 축소 왜곡돼 왔음을 밝힌다.
나카츠카 교수는 일본 후쿠시마현(福島縣) 현립도서관에서 발굴한 ‘일청전사초안(日淸戰史草案)’을 근거로 이 사건이 “일본 정부의 의도에 따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관이 서울 주둔 일본군과 모의해 주도 면밀하게 준비한 계획적 군사행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공식 발간된 ‘메이지(明治) 27, 8년 일청전사’는 이 무력행동을 “조선 병사의 폭거에 의한 소규모적인 양국 군대의 충돌이었다”고 축소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카츠카 교수는 1894년 당시 일본 군부 및 외무성 등이 조선왕궁점령사건을 축소 은폐 왜곡한 배경에는 이 행위가 당시의 국제법 상으로도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카츠카 교수는 “이같은 일본의 사료 축소 왜곡은 청일전쟁 당시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번 행사에는 국내 인사들 외에 중국 일본 학자 및 일본의 시민운동가 120여 명이 참가해 학술대회와 함께 유적지 답사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갖는다. 063-232-1894
<김형찬기자>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