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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4월 1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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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스▼
1971년 3월 뉴욕타임스는 극비 문서를 한 부 입수했다. 67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지시로 작성된 7000쪽 분량의 ‘펜타곤 페이퍼’. 불과 15부만 만들어졌던 1급 비밀 보고서였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이 무차별적으로 베트콩 양민들을 학살했고 미국인들에게 베트남 참전의 정당성을 주입시키기 위해 조직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했다는 등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고서를 단독 입수한 NYT가 보도 여부를 놓고 석달 동안 내부 논란을 벌였을 정도였다.
자문변호사들은 보도에 반대했고 편집국은 강행을 고집했다. 결국 당시 발행인인 아서 옥스 펀치 설즈버거가 개입했다. 설즈버거는 보도하라고 지시했다. 71년 6월 13일, NYT는 시리즈를 시작했다.
1회가 나간 직후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압력을 가했다. 법무장관은 “미국의 국익을 해친다”며 연재중단을 요구하는 한편 첩보법 위반으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NYT는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고 시리즈와 함께 정부의 압력에 대한 기사도 함께 내보냈다. 정부는 뉴욕지방법원에 ‘출판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연재물은 나흘 만에 중단됐다. 그러나 NYT는 굴하지 않았다. ‘수정헌법 1조에 명시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대법원에 항소했다. 그 와중에 ‘라이벌’인 워싱턴포스트도 뒤늦게 이 보고서를 입수했다. NYT에 특종을 빼앗겼던 워싱턴포스트는 사소한 경쟁심과 자존심을 버리고, 주식공개라는 미묘한 시기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NYT의 뒤를 이어 연재를 시작했다. 2주일 후, 대법원은 결국 NYT 손을 들어줬다. NYT는 이 보도로 1972년 공공보도부문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워싱턴포스트▼
1972년 6월17일 워싱턴 워터게이트호텔에 들어와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5명의 괴한이 침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모든 언론이 단순 침입, 절도사건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WP는 침입자 중 한명이 전직 백악관 보좌관 및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의 관계자가 함께 쓰는 사무실에 수차례 전화한 사실 등을 밝혀내고 본격적인 사건 추적에 들어갔다.
사건 발생 한달 후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닉슨 재선위원회와 침입자간의 관련 사실을 폭로했다. 재선위원회의 정치사찰용 비자금, 대통령 측근의 연루 사실 등을 잇따라 내보냈다. 이 과정에는 ‘딥 스롯(deep throat)’이라는 백악관 내부 제보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날카로운 펜끝이 점차 백악관을 향하자 여러 경로를 통한 ‘취재 중단 압력’이 시작됐다. 닉슨은 WP에 타격을 주기 위해 워싱턴스타와 독점 인터뷰를 하는 등 WP의 경쟁지에 일부러 특종을 주기도 했다. WP가 소유한 2개 TV방송국에 대한 면허 취소 압력도 가해졌다. 광고주, 투자자들에 대한 압박도 시작됐다.
그러나 WP는 속보가 없을 때면 사설과 칼럼을 써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독자들에게 계속 상기시켰다. 결국 닉슨은 사건을 서둘러 종결하기 위해 책임의 일부를 시인했고 WP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WP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물고 늘어졌다. 닉슨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사실이 하나씩 밝혀졌고 74년 8월 8일 마침내 닉슨의 사퇴로까지 이어졌다. 단순 절도로 묻힐 뻔한 사건을 권력에 맞서 2년여 동안 싸우며 끝내 진실을 밝혀낸 WP의 승리였다.
▼르몽드▼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두달여 앞둔 95년 2월 20일 프랑스 정가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관련된 프랑스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일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대통령궁이 테러 방지를 내세워 정치인 언론인 변호사 등 수백명의 인사를 대상으로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불법 도청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도청일지를 르몽드가 보도했기 때문. 프랑스법은 국가 안보나 테러 조직 범죄에 관련된 사건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도청을 금지하고 있다.
85년 9월부터 86년 3월 총선 직전까지 118회의 각종 도청 기록을 담고 있는 5장의 컴퓨터 디스켓에는 르몽드의 에드위 플레넬 기자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플레넬은 82년 8월 아일랜드인 3명이 북아일랜드공화군(IRA) 소속 테러리스트라는 혐의로 기소된 이른바 ‘뱅센 아일랜드 사건’이 프랑스 정부기관인 대통령궁 직속 테러대책반(GIGN)에 의해 조작됐음을 밝혀내 명성을 날렸던 탐사보도 전문기자.
그는 3년 뒤인 85년 7월 10일 발생한 국제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 소속 탐사선 레인보 워리어호 폭파, 침몰사건에도 역시 태평양에서 핵실험을 계획하고 있던 프랑스 정부가 개입됐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국제적인 반향과 함께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됐다.물론 프랑스 정부는 이를 부인했지만 플레넬기자는 2개월 뒤 국방부의 개입 사실을 입증하는 기사를 르몽드의 1면 머릿기사로 싣었고 샤를르 에르뉘 국방장관은 사임해야 했다.
이 즈음 플레넬 기자의 집과 사무실은 이미 도청되고 있었고 일거수일투족도 감시당하고 있었다.
전화도청을 주관하던 기관은 대통령궁 직속의 부처간 통제부대(GIC)로 테러감시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실제로는 반정부 인물이나 단체 관계자들의 동태 파악과 정보수집에 활용돼 왔다.
플레넬기자가 전화도청 대상자 명단에 포함된 것은 그가 반정부 성향의 인물인데다 정부안에서도 극소수 인사들만 관련됐던 두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어디에서 입수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정부의 조직적인 불법도청행위는 92년 법의 심판대에 올랐고 GIC의 책임자 크리스티앙 프루토는 98년 사생활 침해 혐의로 기소됐다. 자신에 대한 정부의 불법도청을 ‘강탈당한 말들’이란 제목의 책으로 펴내기도 한 플레넬기자는 현재 르몽드 편집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프랑스에서 언론의 자유는 1881년 공표된 ‘언론 자유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고 있다. 출판의 자유와 검열 금지가 주요 내용이다.
<파리〓김세원특파원>claire@donga.com
▼아사히신문▼
1879년 창간된 후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줄잡아 70여차례나 발매금지 또는 발행정지를 받았을 만큼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1918년 아사히는 필화사건에 휘말려 발행금지(허가취소)의 위기에 처했다. 2년전 출범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전 조선총독)내각의 강권통치와 독선을 줄기차게 비판해온 데 대한 정부의 보복이었다. 결국 사장과 편집국장, 간부사원들이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우익세력들이 불매 및 광고불게재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아사히신문은 의연함을 잃지 않고 ‘정론’을 고집했다. 사건의 모든 경위와 신문사의 기본 입장을 사고로 게재하고 ‘아사히신문 편집강령’을 만들어 발표했다.
당시 아사히신문이 편집강령에 처음으로 사용했던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단어는 그 후부터 일본 언론들의 슬로건이 됐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이 일으킨 만주사변을 전후해서 아사히신문은 군부로부터 ‘반군(反軍)신문’ ‘국적(國賊)신문’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또다시 곤경에 처했다. 아사히신문이 일관되게 군비축소 등을 주장하는 등 군부정책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제기했기 때문이다. 1936년 군내부의 알력으로 쿠데타(2·26사건)가 일어났을 때는 아사히신문의 논조에 불만을 품은 일단의 군인들이 아사히신문 도쿄(東京)본사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도 뼈아프게 반성하는 대목이 있다.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던 군부를 견제하지 못하고 이에 협조했던 부분이다. 아사히신문만이 저지른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은 전후 이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정부에 대한 비판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사히의 이런 자세는 요즘 우익세력들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우익계열의 잡지 등은 최근 ‘아사히신문 때리기’를 강화하고 있다. 한 예로 최근 역사교과서문제를 둘러싸고 아사히신문의 논조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아사히신문은 매국신문’이라거나 ‘한국과 중국의 홍보부’라고 매도하고 있지만 아사히는 불편부당한 자세를 지키고 있다.
<강수진기자>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