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얼음과 불의 노래 1~4

입력 2001-01-12 19:03수정 2009-09-2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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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과 불의 노래 1∼4/조지 R R마팀 지음/서계인·이은심 옮김/각 330쪽 안팎 7500원/은행나무

출판사의 소설 홍보담당자가 흔히 저지르는―저지른다는 인식도 없이 저질러서 더 난처한―오류가 있다. 홍보담당자들은 흔히 자신이 소개하는 소설이 ‘교활한 배신, 치밀한 음모, 숨막히는 모험, 뜨거운 사랑, 그리고 무한한 스펙터클로 가득차 있다’고 주장한다. 이 말 자체가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홍보담당자가 저지르고 있는 내면적 오류는, 그가 담겨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다 존재하려면 그 소설의 분량이 원고지 수만 매를 간단히 넘길 것이라는 사실이다. 2000∼3000매짜리 소설에 이런 카피가 사용되었을 때, 주제나 인물 등이 담길 분량은 남아있는가 하는 짓궂은 질문을 떠올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촌철살인의 주제전달은 가능하다. 하지만 촌철살인의 모험극이나 촌철살인의 스펙터클 같은 것은 말도 안된다. 결국, 그 누구도 ‘삼국지’나 ‘태백산맥’을 2000∼3000매 정도로 줄여 놓은 다음 원전과 똑같은 느낌을 전달하길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대하소설에는 대하소설만의 규칙과 호흡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규칙과 호흡이 올바로 구현되었을 때 비로소 거기엔 ‘교활한 배신, 치밀한 음모, 숨막히는 모험, 뜨거운 사랑, 그리고 무한한 스펙터클’ 등이 담길 수 있다.

‘샌드킹’으로 국내 SF소설 마니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조지 R R 마틴의 장편 판타지‘얼음과 불의 노래’는 홍보담당자의 면죄부가 될 만한 소설이다.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수상한 ‘샌드킹’에서 이미 잘 드러난 것이지만, 조지 R R 마틴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진부한 관용구에 놀랍도록 부합하는 작가다.

그리고 그의 스토리텔러로서의 역량은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치밀한 세계관과 탁월한 역사관, 날카로운 인간 해석 등의 흔하디 흔한 말은 차치하자. 이것은 재미있게 읽힌다. 소설이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을 분명히 갖고 있다.

같은 하이 판타지이긴 하지만 이것을 제2의 ‘반지 군주’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반지군주’의 영국적 유머 및 고색창연함은 ‘얼음과 불의 노래’의 미국적 액션 및 속도감과 분명히 구분된다. 하지만 이들은 판타지라는 만국 공통의 코드를 공유하며, 그 코드를 공유해보는 것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의 초입에서 한국적 판타지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한국적 판타지를 창조하기 위해 ‘환단고기’와 ‘삼국유사’를 뒤적거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얼음과 불의 노래’를 읽어보고 신화와 전설, 고대사와 중세사는 존재하지도 않는 저 젊은 나라 미국의 작가가 어떻게 하이 판타지를 쓰는지 관찰해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지 않을까.

이영도(판타지소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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