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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2월 17일 19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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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오래된 프라하의 유태인 거리를 배회하면서 익명화되어 가는 현대인을 그린 카프카, 파리와 런던 동유럽을 오가며 삶의 아이러니와 농담 같은 사랑을 보여준 밀란 쿤테라, 한 집안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근대사를 섬진강의 유장한 흐름처럼 그려낸 박경리. 이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주인공의 삶과 더불어 특정 공간과 시간이 뿜어내는 독특한 색깔과 향취도 느낀다.
문학은 개인과 개인, 사회와 개인이 부딪치면서 빚어내는 갈등을 시공간의 생생한 이미지 속에서 전개시키며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래서 프라하의 어둡고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빼놓고 카프카는 있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문학은 무엇보다 지역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
문학이 문자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미묘한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 준다면 디자인은 시각 언어를 통해 일상 속의 정서를 형성한다.
시각은 단지 광학적인 물리작용이 아니라 우리에게 녹아 있는 사회성과 역사성이 동시에 작용하는 가치 판단의 감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쓰는’ 디자인은 글을 ‘읽는’ 행위 못지 않게 독특한 이미지의 세계를 이루어내며 감성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인공환경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디자인은 언어보다 오히려 강력한 힘으로 우리의 일상을 창조해내는 물적 표정이다.>
지난 150여년간 산업화 시대의 서구세계가 추구해 온 이상은 오로지 합리성과 과학적 보편성에 입각한 질서의 세계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구는 세계화를 이뤄냈으며 디자인 역시 이것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가시물이었다. 디자인 언어는 보편적인 법칙을 가져야 했으며 당연히 지역적 특수성이나 역사성은 무시되었다. 이것을 건축에서는 국제주의적 양식이라고 한다. 우기가 있는 지역에서도 경사진 지붕을 없앤 채 기능성이나 합리성만을 강조한 직육면체의 건물이 들어선 것이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을 전개시킨 서구의 디자인 문화는 어떤가? 프랑스의 센 강변에 지어진 아파트는 그들의 역사 속에 간직해 온 전통 양식과 장식을 버리지 않았기에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이나 근교의 베르사이유 궁전과 시각적 충돌을 빚지 않는다. 영국의 어느 곳엘 가더라도 최첨단의 전위적인 건물과 고풍스러운 역사적인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까닭은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는 저력이 뿌리깊은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 지역 고유의 특성을 현대성과 자연스럽게 결합한 이집트 건축물 아드레 아메랄의 내부
독일인의 특성이라는 단순함과 솔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독일 디자인 또한 그들만의 특색을 보이고 있으며, 예술적 전통과 화려하고 분방한 기질을 자랑하는 이태리 디자인도 “역시 이태리 적이야” 하는 평가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디자인 또한 무엇보다 일본다운 성향을 보이고 있다. 서구의 기술문명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현대 문화의 한 장을 창조했다는 일본 가전회사들은 세계화 전략과 더불어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와 선, 형태 등에 기초한 디자인물을 창조해냄으로써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한 눈에 ‘일본산’임을 알아보게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아무리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형태언어를 창조하여 세계화시켰다 하더라도 선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나라의 디자인은 이렇게 자국의 문화적 전통에 뿌리를 둔 지역성을 견지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전하면서 이것을 디자인 언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제적인 형태미학을 중심으로 한 디자인이 쇠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문학에서 시대성과 역사성을 초월한 환타지 소설이 주목을 끌 듯 지역성을 알 수 없는 전위적이고 초시대적인 조형 언어는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더욱 발전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성이나 전위성 역시 깊은 역사의 숨결이 아로새겨진 독특한 문화 속에서만 탄생된다.
‘합(合)한 것은 분(分)하고, 분(分)한 것은 반드시 합(合)한다.’ 삼국지 첫 구절이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계의 디자인은 이제 지역적 특성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지역적이고 시대성을 띄는 문학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 주듯 디자인에서도 이제는 이런 요소를 내포한 것들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문제는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조형성과 더불어 어떻게 지역적 특수성을 구현해 낼 것인가 하는 질문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터넷의 확산에 따른 보편주의가 강화될수록 여기에 대비되는 자신만의 특성이 있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로 연결된다.
우리는 어떤 분화된 줄기로 이 세계의 흐름에 동참할 것인가? 어떻게 ‘나’라는 개체성을 표현할 것인가? 답은 자명하다. 상업주의에 뿌리를 둔 서구의 문화를 상징적으로 소비하는 행위 속에서 진정한 개성은 피어날 수 없다. 고급 상표를 붙인 제품의 어떤 점이 좋고 마음에 들어 선택하는지도 모른 채 구치, 페라가모, 프라다 등 서구 명품 브랜드에 열광적으로 집착하는 문화적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내 것’은 자랄 수 없다.
디자인은 특정 사회의 문화적인 감수성과 기술력이 제 각각의 표정으로 구현되는 가장 기본적이고 직접적인 생활언어이다. 그렇기에 서구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서 벗어나 ‘내 문화’의 독자성을 의식적으로 추구해나갈 때만이 우리 디자인의 특수성 또한 가능할 것이다.
―시리즈 끝―
조현신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대학원교수) lilyb@hanan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