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이젠 다모작"…퇴출여파 '평생직장' 옛말

  • 입력 2000년 12월 15일 18시 57분


《대기업 L사의 중간간부인 이모씨(35)는 최근 두 달째 퇴근만 하면 모든 약속을 뿌리치고 귀가해 ‘인생시간표’를 작성중이다. 그의 노트에는 ‘37세 퇴사, 38∼39세 IT관련 부품개발업체 설립, 48세 이후 육아관련 캐릭터 분야로 전환’ 등의 ‘연령대별 직업계획’이 빼곡히 적혀있다.

그는 회사에서 두 차례 표창을 받을 정도로 업무능력을 인정받았지만 “회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퇴사작전’의 이유를 설명했다.》

S증권의 대표적 영업맨인 P씨(40)는 최근 일주일에 두 세번씩 밤마다 손에 밀가루를 묻힌다. 한 야간대학원에 개설된 제빵과정을 밟고 있는 것.

“이젠 평소 원하던 일을 하고 싶다”는 게 P씨의 말. 나이가 더 들면 화원도 운영해 볼 작정이다.

최근 멀쩡하게 일 잘하던 30, 40대 직장인 가운데 이처럼 전직을 꿈꾸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이른바 ‘인생 다모작(多毛作)’족이 나타나고 있는 것.

이런 현상은 구조조정 등의 영향으로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진 데다 최근 연봉제 도입으로 조직에 대한 충성도 마저 급격히 퇴색한 데 기인한다.

이들 ‘다모작’족은 △중장기적 직업설계를 토대로 하고 △진출분야도 벤처뿐만 아니라 제조업 서비스업 등으로 다양하다는 점에서 과거의 ‘벤처행 엑소더스’와 구별된다.

▽실태〓얼마전 직장인 4750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에서 11.4%가 현재의 일을 그만두거나 업종을 바꾸고 싶다고 답했다. 안주엽 연구위원은 “조직에 대한 불안감이 직장인들로 하여금 이탈을 꿈꾸게 한다”고 설명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98년 연봉제 실시와 함께 사측이 ‘더 이상 붙잡지 않는다’고 천명한 뒤 ‘퇴직 이후’에 대한 대화가 공공연해졌다”며 “사석에서 ‘난 2년 내에 나간다’ ‘다른 일을 위해 준비중’이라는 등의 말을 쉽게 듣는다”고 전했다.

▽조직도 ‘다모작’족에 대비〓일부 기업은 이 ‘자발적 이탈’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직지원제도인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를 서둘러 도입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여년 전에, 일본에선 90년대 초부터 등장한 이 제도는 개인별 직능검사와 커리어플랜 작성 등을 통해 제2의 직업을 찾도록 돕는 것.

이달 초 전직지원제도를 도입한 제일제당은 해당직원들을 대상으로 3개월 일정으로 직업전략 수립을 돕는다는 계획. 1인당 소요비용은 500만원선. 대덕의 한 엔지니어링업체도 직무에 만족하지 못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직무를 조정하거나 상대적으로 일이 많지 않은 부서에 배치해 전직에 대비한 자기계발 기회를 주고 있다.

이처럼 여러 회사가 직원들의 ‘퇴직 후’까지 염려하게 된 상황과 관련해 삼성경제연구소 정권택(鄭權澤)수석연구원은 “보다 ‘네트워크화’된 사회에서는 한 조직이 그 조직을 떠난 동료들을 광범위하게 끌어안는 데서 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업체까지 등장〓최근엔 이 전직지원제도를 전담하는 컨설팅업체도 급증하고 있다.

미국계의 컨설팅업체인 DBM코리아는 PNG 등 4개 업체를 대상으로 아웃플레이스먼트를 실시중이며 이미 800여명의 직장인에게 상담 직무교육 등을 거쳐 적성에 맞는 직장을 알선했다.

또 다른 컨설팅업체인 리 헥트 해리슨도 IT업체인 A사 등 3개사를 대상으로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고 에듀맨(www.eduman.com) 등 인생설계를 자문하는 온라인 사이트들도 성업중이다.

경기대 엄길청(嚴吉靑)교수는 “본격적인 디지털시대에 접어들면서 직업의 사회적 가치가 변하는 주기는 더욱 짧아질 것”이라며 “앞으로 특정시기의 사회적 요구에 맞춰 직업을 바꾸는 ‘릴레이 잡(Relay Job)’이 보편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병희·이승헌기자>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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