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그린벨트 "술집-카페뿐"…37곳 지정 단속강화

  • 입력 2000년 7월 19일 18시 49분


“보세요. 술집 말고 갈 데가 있으면 찍어봐요.”

18일 밤 11시반경 ‘청소년 그린벨트’로 지정된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만난 10대의 한 고교생이 말했다. 인근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사 마셨다는 그는 “‘청소년 그린벨트’가 뭔지 관심도 없지만 술집만 늘어선 곳에서 누가 뭘 보호하느냐”고 말했다.

이날 밤 10시경 대낮처럼 환하게 네온사인이 거리를 비추고 있는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와 강남역 사거리. 문닫은 병원과 사무실 외에는 모두 술집과 카페, 노래방뿐이다. 청소년의 발길을 허락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노래방도 10시 이후엔 청소년 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서울시와 서울지검은 13일 현장실사를 거쳐 대학로 강남역 신촌로터리 등 청소년이 많이 몰리는 서울시내 37개 지역을 ‘청소년 그린벨트’로 지정한 뒤 18일밤 이 지역들에 대한 합동단속을 처음 실시했다.

‘청소년 그린벨트’는 출입이 전면 금지되는 레드 존(Red Zone)과는 달리 청소년들이 마음놓고 출입할 수 있는 지역. 이들 지역의 유해업소를 단속해 청소년들에게 놀 만한 공간을 마련해주겠다는 취지다.

단속과 처벌이 강화돼 청소년들의 유흥업소 출입은 상당히 근절됐지만 정작 건전한 놀이문화를 즐길 공간은 아직 마련되지 않고 있다. 말만 ‘청소년 그린벨트’일 뿐 청소년을 보호할 ‘울창한 숲’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것.

이날 합동단속반과 동행해 살펴본 결과 ‘청소년 그린벨트’로 지정된 대학로 강남역 압구정동 일대 술집에서는 단 한명의 청소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위법행위가 적발되면 과징금과 영업정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올초부터는 2개월간 영업정지를 당해 사실상 폐업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강남역 사거리의 호프집 ‘고구령’의 주인 이순태(李淳泰·32)씨는 “청소년을 출입시켰다가 적발되면 2개월 동안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신분증을 확인한다”면서 “잘못 받아주면 금세 소문이 나 청소년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아예 돌려보낸다”고 말했다.

대학로에서 만난 10대 김모군은 “대학로에는 노래하거나 춤추는 친구들이 많아 가끔 구경하러 나오지만 강남이나 신촌에는 술집 외에는 볼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함께 있던 또 다른 10대 최모군은 “극소수지만 청소년을 받아주는 술집은 입 소문을 통해 안다”고 말해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단속만 펴는 것은 청소년들을 더욱 음지로 몰아갈 수 있음을 내비쳤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준호(金俊鎬)교수는 “청소년들이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는 현실 속의 공간은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청소년 보호 정책’만 있는 셈”이라며 “최소한 그들이 출입할 공간을 마련해 준 뒤 정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동영기자>arg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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