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美물질문명서 유럽 정신문화로 귀향

  • 입력 2000년 4월 21일 21시 18분


▼'산타 페(Santa Fe)'/이브 베르제 지음/그라쎄 출판사▼

세계화와 더불어 세계의 미국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유럽에서는 자주 들린다. 3월에 출판된 이브 베르제(Yves Berger)의 소설 ‘산타 페’는 그 한 예. 작가가 40년 동안 줄곧 미국예찬을 소재로 작품을 써 왔기 때문에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프랑스 아비뇽에서 1934년에 출생, 60년에 그라세출판사에 들어가 현재 이 출판사 문학부장인 베르제는 62년 페미나상을 수상한 ‘남쪽’, 94년 메디치상을 받은 ‘강의 흐름 안에서의 정지’와 ‘아메리카에 열광한 사람’ ‘신세계의 아침’ ‘비가 내린 후의 세계’ 등의 소설, ‘아메리카’ ‘평원의 인디언들’ 등의 사진집 출판을 통해 ‘친미(親美)’ 작가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신작 ‘산타 페’에서 그는 아메리카와의 작별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파리에 도착한 소설의 주인공 로크와 필라델피아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레아는 르와시 파리국제공항의 파업으로 우연히 만나게 된다. 환갑을 넘긴 로크는 18세의 레아에게 정열을 느껴 젊은 시절 꿈의 대상이었던 미국에서의 가장 환상적인 여행을 제안한다. 시카고에서 국도 66번을 타고 서남 방향으로 달리며 캔사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아리조나주 등 7주를 거쳐 서부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는 것. 젊었을 때 미국을 처음으로 여행하며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느꼈던 자유, 행복의 충격과 감동을 그녀와 공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젊음을 되찾으려는 욕망이다.

그런데 여행 중 예상과는 달리 레아는 미국의 이런 신화에는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로크의 정신적 환희와 감동을 전혀 공유할 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깊이와 경이로움을 감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루해하며 로크의 열정어린 묘사에 그녀는 상상력과 어휘의 한계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녀의 관심은 말하는 건전지 동물 로봇. 이 장난감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쳐주는데 심취해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꿈과 희망 자유 등 정신적 가치의 상징으로서의 ‘신세계’와 현대의 상업적 가치와 기계문명이 지배하는 그 이면 세계의 충돌을 보여주면서 주인공이 미국의 환상에서 깨어남을 그리고 있다. 레아는 후자의 알레고리로서 정신문화의 빈곤을 상징한다.

미국은 19세기 유럽인에게 ‘약속의 땅’이자 현대문명의 모델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미국에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유럽의 미국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세계화로 인한 시장가치의 절대화와 미국문화로의 획일화를 인간의 정신문화를 위협하는 하나의 위험신호로 보게 된 것이다. 이브 베르제의 이 소설은 미국이 상징하는 현대 물질문명으로부터 유럽의 오랜 정신문화에로의 귀향이라고 볼 수 있다.

<조혜영 프랑스 국립종교 연구대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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