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東亞 꿈나무 장학금

  • 입력 2000년 3월 31일 11시 26분


“이 장학금을 동아일보 창간 80주년을 맞는 2000년 4월1일부터 신체장애 학생과 문예창작 진흥사업을 위해 써 주십시오.”

23년 전인 77년 4월1일. 70대 초반의 한 노신사가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사를 찾았다. 노신사는 이동욱(李東旭)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만나 3500만원 어치의 한전 주식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이 노신사는 부산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던 고 인산 오창흔(仁山 吳昶昕)씨. 이동욱사장은 오씨로부터 장학금을 전달하게 된 사연을 전해듣고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장학금은 청력장애로 고생하다 두달 전 27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여섯째딸 수인(壽仁)이의 유언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광복 전 독학으로 의사자격증을 따낸 오씨는 고향인 제주도에서 도립병원장까지 지낸 뒤 49년 부산으로 이사해 소아과 병원을 개업,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생활을 해왔다. 4남6녀의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에겐 무엇보다 큰 행복이었다.

그러던 중 수인씨가 초등학교 6학년때 중이염 치료를 위해 맞은 주사의 부작용으로 갑자기 청각이 마비됐던 것. 남달리 총명하고 쾌활하던 여섯째딸의 갑작스러운 불행은 단란했던 가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오씨 부부는 그 뒤 수인씨를 데리고 전국의 이름난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수인씨는 고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할 정도로 총명했으며 아버지 오씨가 양쪽 대퇴골을 갈아끼우는 대수술을 받은 뒤에는 날마다 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르는 등 효성도 극진했다.

남다른 의지력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가던 수인씨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73년 어머니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명랑하던 수인씨는 그때부터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77년 2월1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인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아버지에게 “저에게 물려줄 재산이 있으면 저처럼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써주세요”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고 오씨는 사랑하는 딸의 뜻을 받들기 위해 동아일보사를 찾았던 것.

오씨는 그 뒤에도 동아꿈나무 재단에 장학금을 6차례나 더 기부했고 2000년 3월 현재 그가 맡긴 장학금은 20억원으로 불어났다.

23년 동안 오씨와 수인씨의 소중한 뜻을 키워온 동아일보사와 동아꿈나무재단은 오씨의 소원대로 올해부터 이 장학금으로 신체장애 학생 지원과 문예창작 진흥사업을 시작하는 한편 창간기념일인 4월1일에는 부산 기장군 대정공원묘지에 있는 오씨의 묘역에 추념비를 봉정할 계획이다.

▼동아꿈나무재단 오늘까지▼

나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각계각층 독지가들의 정성을 모아 동아일보사가 가꾸고 있는 ‘동아꿈나무재단’이 올해로 설립 29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이 재단에 성금을 기탁한 독지가는 단체를 포함해 203명에 달하며 장학사업이 본격화되는 올해 현재 성금의 총액은 이자를 포함해 모두 44억903만3334원으로 불어났다.

처음 동아꿈나무를 심은 독지가는 제주 서귀포에서 감귤농장을 경영하던 현암 오달곤(玄岩 吳達坤)씨. 평생 궂은 일을 하며 어렵게 재산을 이룬 오씨는 71년 3월 서울 동아일보사를 찾아와 당시로서는 거액인 100만원을 내놓았다. 오씨는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인 2020년부터 가난한 영재들을 위해 이 장학금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오씨는 8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8차례에 걸쳐 1200만원의 장학금을 보내왔고 그 뒤에는 오씨의 외아들 운봉(雲峰)씨가 500만원을 더 맡겨왔다. 오씨 부자가 기탁한 장학금은 현재 3억7000여만원에 이른다.

당시 동아일보에 오달곤씨가 장학금을 보내온 사연이 소개되자 전국의 독지가로부터 성금 기탁이 줄을 이었다. 오광수(吳光洙)씨는 자신의 집을 판 돈 등으로 74년부터 77년까지 4차례에 걸쳐 1700만원을 보내오기도 했다.

독지가들의 장학금이 모아지자 동아일보사는 85년5월 재단법인 동아꿈나무재단을 설립했다. 당시 이 재단의 기본재산은 75년 동아일보사가 광고탄압을 받을 때 국민이 모아준 성금 등 5억원과 권희종(權熙宗)씨가 희사한 토지 7400평(당시 감정가 23억원).

지금까지 동아꿈나무재단에는 10회 이상 장학금을 기탁한 독지가도 12명이나 되며 익명으로 장학금을 낸 사람도 9명이 있다.

이 가운데 김윤철(金潤哲·58·서울 관악구 복지후원회장)씨는 90년부터 지금까지 94차례에 걸쳐 매달 장학금을 보내오고 있다.

<홍성철기자>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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