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의 책]‘한 줄도 너무 길다’ 하이쿠 시 모음집

  • 입력 2000년 3월 22일 19시 25분


▼‘한 줄도 너무 길다’하이쿠 시 모음집/류시화 엮음/이레 펴냄/176쪽 6000원▼

초등학교 시절 휑한 교정에서 쭈빗쭈빗 서서 듣던 긴 훈화말씀보다도, 예배당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듣던 설교보다도 더 내 가슴을 후려칠 한 구절이 여기 있다. 인생을 뒤흔들 구절은 한 줄이면 충분하다. 아니 한 줄도 너무 길다.

“이 숯도 한 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나비 한 마리 돌 위에 앉아 졸고 있다 어쩌면 나의 슬픈 인생을 꿈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달팽이 얼굴을 자세히 보니 너도 부처를 닮았구나”…이 외에도 239편의‘한 줄’들이 여기 있다.

이것들 속에서 ‘내 인생의 한 줄’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불행한 일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래도 당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깨달은 일. 게다가 고대 일본의 방랑시인 바쇼, 이싸, 시키 등의 한 줄 시를 접할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 ‘행운아’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행운아중 한 명인 류시화씨는 “내 눈에서 약간의 비늘이 떨어져 사물과 인생의 실체를 조금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노라”고 그 기쁨을 자제하여 표현한다.

‘하이쿠’(俳句)는 지금까지 쭉 얘기했던 ‘한 줄시’로 고대 일본의 운문형태이며 서구에서는 주목받은 지 오래이다.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이제 하이쿠를 읽고 다음과 같이 바보같은 소리는 하지 말 것.“시가 왜 제목만 있고 본문은 없어요?”

이희정<동아닷컴 기자>huib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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