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든 책]화가 김병종/엔도 슈사쿠 「침묵」

  • 입력 1999년 10월 8일 17시 58분


대학시절 한때 나는 일본 문학에 심취했었다. 이노우에 야스시, 오에 겐자부로, 엔도 슈샤쿠 같은 작가들을 좋아하였는데 이들은 선이 가는 일본의 탐미적 사소설(私小說) 작가들과는 사뭇 달랐다. 작품마다 신과 인간과 역사의 격랑이 있었다. 그들은 그 격랑에 대고 쉼없이 ‘왜?’라는 물음을 제기했고 그런 물음이야말로 당시 삶과 예술에 대해 회의하던 나의 실존적 질문이 되기도 했다.

엔도 슈샤쿠의 ‘침묵’은 전제군주 시절 예수를 전하기 위해 목숨 걸고 일본에 갔다가 결국 예수의 초상을 밟으며 배교했던 한 신부의 생애를 교황청에 보내는 보고서 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그는 인간의 악에 대해 때로 차갑게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부르짖고 절규한다. 그러다가 결국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의 초상을 밟으며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일본의 톨스토이로 불리기도 하는 엔도는 그의 다른 작품 ‘바다와 독약’에서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전율할만한 악을 응시한 바 있는데 ‘침묵’에서는 다시 그 악을 선과 대립시킨다. 순교와 배교의 갈림길에 선 한 인간의 핏빛 고뇌를 통해.

주인공인 신부가 예수의 초상화를 밟는 순간 그 초상화는 말한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짓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괜찮다. 밟아라. 어서 밟아라”라고.

고백하건대 내 첫 개인전 ‘바보예수’는 바로 그 엔도의 ‘침묵’이 던져준 파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스무살에 읽은 ‘침묵’의 강렬성이 20년 가까운 세월 뒤에 그림으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

(서울대 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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