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1999년 6월 25일 23시 15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나는 고향 충남 공주의 시장 좌판에서 그 책을 샀다. 거의 50년쯤 전의 그 시절 5일장 장날이면 시장에는 초라한 노천 책장수가 몇 있었고, 거적같은 것을 펼쳐놓은 서너평 정도의 ‘장똘뱅이’ 서점에는 모두 합쳐도 수백권이 되지 못할 두껍지 않은 책들이 놓여 있었다. ‘토정비결’ ‘장화홍련전’ 등 옛날 이야기책, 그리고는 어쩌다가 발견되는 참고서 몇권이 전부였다. 초라하기그지 없는 서점이 내게는 첫 도서관이며 서점이었다.
생각해보면 10대까지의 독서란 소설이 거의 모두였다. 물론 공부하기 위해 교과서와 참고서를 읽는 일을 아주 열심히 했고 그래서 공부도 썩 잘했지만 그걸 독서라 부르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대학시절 나의 독서는 엉뚱하게 나가기 시작했다. 이광수 김내성에서 방인근까지의 우리말 소설에서 딕슨의 단계식 영어 소설까지를 읽던 내가 그때부터는 펄 벅, 콜드웰, 모옴 등의 영어소설, 월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등을 읽었다. 영어공부를 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책 모서리에 노트를 붙이는 버릇을 기르게 되었다. 새로 찾은 영어 단어의 뜻을 적는 일은 그후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면서도 이어졌다. 따로 노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주목할만한 부분을 색연필로 줄쳐 두거나 간단한 노트를 붙이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1967년 미국 유학을 가기 전까지 나의 독서는 오락과 학습을 겸한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는 미국 유학중에는 책을 다 읽는 법이 없이 찔끔찔끔 필요한 부분, 또는 관심있는 문제만을 찾아 그 부분만을 읽고 노트하며 넘어갔다. 미국 대학원을 다니면서 나는 유럽 사상사에 꽤나 미쳐 많은 책을 읽고 또 감동을 받았다. 사실 나는 미국에 가기까지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자유주의 등등 그 많은 ‘주의’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서양사개론서에다가 ‘혁명의 해부’(브린튼), ‘의식과 사회’(스튜어트 휴즈), ‘18세기 사상가들의 하늘의 도시’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이상 나버) 등 수많은 책이 내 노트로 채워지면서 나는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리고 또 얼마나 허약하고 허망스러운가를 함께 감지하게 되었다.
책을 통해 나는 철이 들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를 꿰뚫어보려는 깊은 관심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특히 유럽 사상사 분야의 많은 책과 그 저자들에게 감사한다. 이 가운데 어느 몇권의 책이 나를 만들어 주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많은 책들이 한가닥씩 역할하여 오늘의 내가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박창래<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