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1999년 6월 14일 19시 21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고종황제의 초상화를 남긴 유명한 화가 채용신(1848∼1941)이 이듬해 그 뜻을 기려 후손의 집을 찾아 ‘김영상투수(投水)도’를 비롯한 그림을 남겼다. 김영상의 손자 김균이 그 회화기법을 기록했다.
그로부터 88년 후. 그림의 모델이 됐던 김영상의 고손(高孫·4대손)이 그 그림을 그린 채용신의 기법을 이어 받아 한국화의 중진으로 떠올랐다. 한국화가 김호석(42).
그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로 뽑혀 15일부터 8월15일까지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갖는다.
‘올해의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들이 한국화단에 공헌한 작가들 중에서 선정하며 한해에 한명이 영광을 안는다. 국립현대미술관 정준모 학예연구실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안목과 역량을 걸고 마련한 전시”라며 “김호석은 한국화의 맥을 잇고 이를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점이 높이 평가됐다”고 말한다. 지난해에는 실험기법을 보여온 한국화가 권영우가 선정됐다.
김호석은 ‘황희정승’ ‘도산 안창호’ 등 옛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선비의 후예답게 “옛 어른들의 삶을 본받아 오늘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자”고 말한다.
회화기법이 독특하다. 흙 풀 등을 섞어 만든 천연염료에 쥐수염붓과 지푸라기묶음 등의 도구로 그린다. 채색방법도 특이하다. 윤곽선을 앞에서 그리고 색은 뒤에서 칠해 앞쪽으로 물감이 배어나오게 한다. 조선후기까지 이어졌던 ‘배채법’이다.
그는 전국의 사당을 돌며 옛 그림을 연구하고 기록에 남아있는 물감제조기법을 응용해 각종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지조있는 집안이었지만 뼈저리게 가난했다. 어린시절 구두닦이 아이스크림장사 등을 하며 어렵게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홍익대 미대도 공사장인부 등을 하며 힘겹게 마쳤다.
“살아가는 모습은 치열하다. 치열한 것은 아름답다. 그래서 이 시대에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담고 싶었다.”
그는 ‘고향을 지키는 농부’ 등 생활주변 풍경에서부터 ‘광주민주화운동’ 등 정치현실까지를 폭넓게 화폭에 담아왔다. 이번 전시회는 이같은 작품 90여점을 전시한다.
〈이원홍기자〉blursky@donga.com
◆독특한 그림도구 눈길
김호석은 쥐수염붓을 아낀다. 탄력적이면서도 힘있는 붓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는 수천 마리의 쥐에서 뽑은 수염으로 직접 이 붓을 만들어 쓴다.
다섯살부터 그림을 그려 칭찬을 받던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쥐수염붓이 좋다는 말을 듣고 쥐수염붓을 꿈꿔왔다. 중학생시절 ‘쥐잡기운동’이 한창 벌어지자 자신이 살던 전주시 덕진동 동사무소 앞에는 동네에서 잡아온 쥐들이 수북히 쌓였다. 그는 오후 내내 앉아서 쥐수염을 뽑았다. 이 때 뽑아놓은 수염들을 아직도 보관, 붓을 만들어 쓰는 것.
지난해 몽골로 스케치여행을 갔을 때도 현지에서 쥐를 잡아 수염을 뽑고 붓을 만들어 썼다. 몽골에서는 야생쥐를 잡아 고기를 먹기도 하는데 집집마다 그 껍질을 모아두고 있어 손쉽게 수염을 구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는 전통적 방법으로 천연 물감을 만들어 사용한다. 푸른색을 내기 위해 놋쇠에 녹을 슬게한 뒤 그 녹을 걷어 쓴다. 배추를 삶은 뒤 막걸리나 소금을 섞어 연두색을 얻으며, 흙을 퍼다가 검정색을 만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