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특별전」 관람객 3만명 돌파

  • 입력 1998년 11월 8일 18시 17분


《발해(渤海·698∼926)가 우리를 찾아왔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발해 건국 1천3백주년 기념 특별전 ‘발해를 찾아서’(동아일보사,전쟁기념관 공동주최·29일까지). 지난달 16일 개막된 이후 매일 2천여명이 특별전을 찾아 관람객이 3만명을 넘어섰다. 지금 왜 발해인가. 발해 열풍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개척했던 발해의 그 당당했던 기상이 이 시대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발해 연구의 현주소와 과제▼

발해 열풍은 한반도를 뛰어 넘어 동북아시아 전체에 몰아치고 있다. 최근 발해사 학술회의가 열렸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선 ‘발해의 별’이란 이름의 술이 팔리고 있고 ‘발해 카페’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북한에서도 학술회의가 열렸고 일본에서는 발해 특집 학술논문집이 발간된데 이어 12월에는 일본 러시아 학자들이 참여하는 발해학술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지금의 발해 열기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발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나 연구수준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 현실은 10명도 안되는 연구인력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일반인이 알고 있는 것도 겨우 교과서 수준.

‘고구려 후예인 대조영이 고구려인과 말갈족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를 물리친 뒤 고구려 옛땅 계루부지역의 동모산 기슭에 나라를 세우니 국호는 진국(震國),연호는 천통(天統)… 이후 국호를 발해로 고쳤고…’ 정도다.

그동안의 발해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민감한 쟁점은 구성원 문제. ‘지배층 고구려인, 피지배층 말갈인’으로 알려진 발해의 구성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중국은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나라로 당나라의 예속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러시아 역시 말갈계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 남북한과 일본은 고구려 국가로 본다. 이같은 시각차는 발해의 영토가 중국 러시아 한반도 등 3개국에 걸쳐 있기 때문. 영토상으로만 보면 한국사에 속할 수도 있고 중국사, 러시아사에 속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최근 러시아에서 열린 발해사 학술대회에 다녀온 송기호 서울대교수는 “벽에 부딪친 문헌 연구에서 벗어나 러시아 중국지역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발해의 객관적인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북한 중국 러시아가 공동연구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발해는 왜 망했을까▼

926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불과 며칠만에 멸망했다고 전해져 온 발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며 우리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개척했던 발해가 왜 그렇게 순식간에 멸망했던 것일까.

발해 멸망은 발해사의 가장 큰 의문. △민족 구성의 취약성 △내부 분열 △마지막 왕 대인선의 무능 등, 멸망의 원인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심지어 백두산 화산폭발로 한순간에 멸망했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물론 화산폭발설은 넌센스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

발해의 갑작스런 멸망에 의아해할 뿐 아직 발해 멸망에 관한 치밀한 연구는 별로 없다.

그러면서도 내분으로 인해 멸망했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김은국 중앙대강사가 ‘발해 멸망의 원인’이라는 논문에서 “발해는 멸망 순간까지도 강대국이었다. 발해가 며칠만에 망했다는 시각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펴 주목을 끌고 있다.

발해는 끝까지 튼튼한 군사력을 유지했고 주변국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러시아 북한지역에서의 발굴 결과에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김씨는 “발해는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거란과 20여년간에 걸친 치열한 격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그 운명을 다했다”며 “고려나 신라와의 협력을 통해 거란을 물리치려 했으나 당시 후삼국이라는 혼란한 정치상황으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김씨의 견해는 결국 ‘내분 때문’이라는 기존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