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낮잠族」잠자는곳 가지가지…사무실선 「안졸린 척」

  • 입력 1998년 6월 22일 19시 37분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오후2시경 급히 회사 화장실 문을 노크한 L전자 박모과장(37). 세칸 중 두칸은 ‘기다려라’(똑·똑). 다행히 마지막칸은 무응답. 문을 살며시 당겨봤지만 잠겨 있다. 의아한 마음에 가만히 눈 감고 살며시 귀를 대보니 나직이 들려오는 소리. “드르렁∼.”

직장 분위기가 극도로 빡빡해진 IMF시대. 사무실에서 낮잠이 사라졌다. “예전엔 책상에 엎드려 잠깐 눈붙이는 직원이 꽤 있었는데 요즘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어요. 누가 뭐라하는 것도 아닌데.”(K기획 최모부장)

하루종일 낮잠만 자는 생활을 하지 않으려면 낮잠을 포기해야 하는 시대. 그 여파로 휴게텔 수면텔 산소텔 등 2, 3년전부터 확산되던 휴식업소들이 찬서리를 맞았다. 대한숙박업중앙회 김문수조직국장은 “‘낮잠 업소’가 IMF직격탄을 맞아 상당수 문을 닫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오후의 졸음은 거역할 수 없는 인체의 섭리. 캐나다 브리티시콜럼비아대 스탠리 코렌교수(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몸은 하루에 두번 가장 졸리는 시간대를 맞이한다. 오전1∼4시와 오후1∼4시. 즉 오후의 졸음은 전날 과음이나 밤잠을 제대로 못잔 경우에만 찾아오는 게 아니라 생리현상인 것.

그래서일까. 아무리 시대가 살벌해도 상당수 직장인은 나름대로 ‘몰래 낮잠’의 꿈길을 열어간다. 회의실 전화교환실(여직원의 경우)지하주차장의 마이카안 등 ‘전통’있지만 남의 눈에 띄기 쉬운 낮잠 명소 대신 요즘 부쩍 각광받는 게 화장실.

“에이, 설마 화장실에서….” 성장기에 재래식 ‘변소’를 경험한 세대는 믿기 힘들겠지만 도심 빌딩에 근무하는 신세대 직장인 중엔 화장실에서의 낮잠 경험자가 의외로 많다. 주로 대강당이 있는 층처럼 사람왕래가 뜸한 곳의 화장실이 애용된다.

대중사우나 원정객도 늘었다. 회사에서 몇정거장 떨어진 낯선 목욕탕에서 ‘익명속의 오수(午睡)’를 즐기는 것. 심지어 거래처 부근 종합병원인 H병원(서울 구의동)중환자실옆 보호자대기실(온돌방)에서 환자가족들 틈에 끼어 낮잠을 잔다는 D사 전모씨(29)같은 극성파도 여럿.

영업직 등 외근직원들은 조금 형편이 낫다. 서대문구청뒤 안산 등산로 입구 2백여m의 산책로엔 평일오후마다 차들이 줄지어 선다. 상당수는 나무그늘 아래에서 카시트를 침대삼아 단잠을 즐기는 직장인의 차. 운전석 앞창엔 양말 벗은 맨발이 척…. 승용차 승합차 미니트럭에 때론 지붕에 경광등 달린 차도. 이곳말고도 효창공원 옆길, 한강둔치… ‘카―냅(Car Nap)’의 명소는 도시마다 숱하다.

보통 직장인이 ‘수업 빼먹고 땡땡이치던 고교시절’의 심정으로 조마조마하게 자는 동안 독립된 사무실이 있는 ‘고위직’은 당당히 낮잠을 즐긴다. 10여년간 중앙부처 국장실에서 비서일을 했던 박모씨(32·여). “국장님들 중 상당수가 오후에 20분정도씩 낮잠을 잔다. 손님이나 외부전화가 오면 회의중 또는 출타중이라 둘러대고 장차관이 찾을 때만 연결한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지중해연안 국가에선 점심식사후 낮잠시간인 ‘시에스타’가 관습화돼 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졸린 눈망울들이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도 시에스타를….’

〈이기홍기자〉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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