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이 영화계로 가는 까닭은?…『표현의 벽을 넘자』

  • 입력 1997년 9월 5일 08시 30분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보호하고 싶다면 남들이 도저히 각색할 수 없는 방식으로 써야 한다네』 현대문학계의 큰 봉우리 밀란 쿤데라. 90년작 「불멸」에 써놓은 이 말처럼 그는 영상시대에 사는 소설가의 생존권을 걸고 「절대로 영화화될 수 없는」 소설을 쓰는 데 골몰해왔다. 하지만 어쩌랴.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보다는 이를 각색한 영화 「프라하의 봄」을 본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쿤데라의 충고와는 정반대로 최근 들어 소설가들은 영화판에 더 깊숙이 들어서고 있다. 영화에 원작을 제공하거나 시나리오를 쓰는 데 만족하지 않고 아예 감독으로 나서기도 한다. 이번 부천국제영화제에 춤을 소재로 한 영화 「교코」를 내놓은 무라카미 류(村上龍·45). 스물네살의 나이에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아쿠타가와(芥川)상과 군조(群像)상을 휩쓸며 일본 현대문학에 한 획을 그었던 기린아. 고교 때부터 16㎜필름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그가 소설가로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다섯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모두 흥행부진. 2일 부천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무라카미는 『작업장소와 협업여부만 차이가 있을뿐 장르를 넘나드는데 어려움이 없다』며 웃었다. 10월이면 또 한사람의 소설가출신 감독이 등장한다. 영화팬들에게는 「스모크」의 원작자로 더 잘 알려진 미국작가 폴 오스터(50). 「뉴욕 삼부작」 등 문제작을 써온 그의 감독 데뷔작은 「다리위의 루루」. 최근 주연남녀로 하비 키텔, 96년 아카데미여우조연상 수상자인 미라 소르비노를 캐스팅했다. 이들이 스스로 밝히는 「내가 영화계로 간 까닭」은 표현의 한계 뛰어넘기다. 「교코」의 경우 주인공인 일본여성 교코는 차차차와 맘보, 룸바를 추며 구원과 희망을 찾는다. 오스터의 「다리위의 루루」도 재즈뮤지션과 웨이트리스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인쇄매체인 소설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춤과 음악 등 「육체성」을 영화로 표현하겠다는 것이다. 「교코」의 영화제작을 마친 뒤에야 이를 소설(민음사 간)로 쓴 무라카미는 「소설은, 책은 고작해야 종이에 지나지 않아. 종이라는 것은 벌레라도 먹어치워버릴 수 있는거야」라는 대목으로 문학의 한계를 고백했다. 한 사람이 전인적인 능력을 갖추는 것이 미덕이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분위기도 소설가의 영화감독되기를 부추긴다. 『왜 영화만인가. 할 수 있다면 사진 행위예술 음악 어느 장르든 나를 표현하는 매체로 다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최근의 분위기다. 프랑스 신철학의 기수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영화 「보스나」로 보스니아내전을 고발한 것도 소설가의 감독 변신과 같은 맥락이다. 소설가이자 영화평론가인 주인석씨는 이같은 흐름에 대해 「문화적 우세종(優勢種)」이 바뀐 것을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풀이한다. 『어느 시대든 대중을 지배하는 「문화적 우세종」들은 첨단 테크놀러지와 결합해 탄생했습니다. 인쇄기술의 발달과 함께 소설이 연극과 음유시인들을 제치고 우세종이 됐던 것처럼 20세기에는 첨단기술에 바탕을 둔 영화가 소설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지요. 에너지가 넘치는 소설가들이 새로운 우세종으로의 전환 실험을 해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 소설과 영화의 만남은 행복한가 ▼ 개봉 한달만에 70만관객을 모았다는 한국영화 「넘버3」. 영화속 호스티스출신의 현지(이미연 분)가 단 한편의 시로 일약 스타 시인이 된다. 이름하여 「스물아홉 섹스는 끝났다」. 90년대를 뒤흔든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패러디한 이 익살에는 뼈가 있다. 송능한감독은 『문학의 상업화를 소재로 우리문화 전반의 속물화 경박화를 비틀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송감독은 소설가의 영화감독 변신에 반대하는 입장.『차라리 영화로 만들 수 있을 만한 좋은 소설들을 더 많이 써달라』고 말한다. 『소설 「아버지」는 1백만부가 팔렸지만 영화에 든 관객은 5만여명도 안됐음을 잘 음미해봐야 합니다. 영화나 TV드라마 같은 소설,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한 소설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시각적인 장치는 감독이나 미술이 알아서해요. 그보다는 소설만이 던져줄 수 있는 묵직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원작이 있어야 좋은 영화도 나올 수 있어요』 지난해 「초록물고기」를 만들어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창동감독은 소설가의 행복한 감독 변신으로 꼽힌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로 이미 영화판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감독은 주위의 부러워하는 시선과는 달리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각자의 길을 가야 취할 것이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초록물고기」의 경우도 처음부터 영화로만 생각했을 뿐 소설로 쓸 생각은 아예 없었다는 것. 『소설과 영화의 행복한 만남이란 없습니다. 소설이 영화를 닮아갈수록 오히려 무력화할 뿐입니다. 다만 최근들어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현저히 상실한 우리문학이 할리우드영화의 철저히 계산된 캐릭터 배치, 구성 등의 노하우는 배워올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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