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이 1백만권 이상 팔려나가면 그것은 이미 출판의 영역을 넘어선다. 일단 1백만권의 책이 「발언」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며 「권력」의 속성마저 띤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인문사회 분야에서 거의 유일하게 1백만권 이상이 나갔다.
이번에 3권을 펴낸 창작과비평사는 어림짐작이지만, 1권이 1백만권 이상 팔렸고 「일부러 어렵게 쓴」 2권은 60만권 정도 나갔다고 한다.
저자 유홍준씨(48·영남대교수).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의 말은 90년대 우리 사회의 국민적 화두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글은 올해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월출산과 남도의 봄」. 문화재와 권력의 관계를 가차없이 파헤쳐 온, 그리고 「운동권」의 논리와 정서로 평판되는 그의 글이 교과서에 실렸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다.
그에 대한, 그의 책에 대한 찬사는 넘치고 또 넘친다.
「박경리의 토지가 한국의 정신적 GNP를 높였다면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이 땅의 면적을 열배쯤 확장시켰다」 「유홍준이 있기 전에 이 땅에는 현재적 의미의 문화유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등등.
「문화재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탁월했지만 비판의 칼이 과연 공정했느냐」는 반론도 거셌다. 그러나 저자는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미술사가들로부터 단 한번도 전문적인 반론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단적인 예가 박정희정권 시절 「문무대왕 해중릉」 조사 및 무녕왕릉 발굴을 둘러싼 고고학계의 논란.
그는 1권에서 대왕암은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산처(散處)라며 당시 조사단의 수증릉 발표를 「최고 권력자의 정치수요에 편승한 사기극」이라고 몰아쳤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대왕암이 유골을 묻은 장처(葬處)라는 기록이 있으며 그것이 산처냐, 장처냐는 문제는 아직 학계의 정설이 없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섣부른 예단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반면에 그는 우리 문화재 발굴사상 최악의 원형파괴 사례로 꼽히는, 당시 김원룡 국립박물관장(93년 작고)의 과오에 대해서는 시종 감싸안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몇달 몇년을 두고 진행돼야 할 발굴이 말 그대로 「권력의 수요」에 따라 단 이틀만에 끝나버린 것에 대해 「당시 고고학계의 한계」 「잘못을 지적할 원로가 없어서」 운운하며 애매하게 얼버무린 것.
이외에도 그의 답사기에 대해 「이의」 이상의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쩌면 이는 그의 말대로, 상당부분 「스타에게 쏠리는 엄청난 질시」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어느 누구의 학문과 감식안도 한 시대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버린」 유홍준이,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기 마련인 「문화권력」으로 전락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