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동아신춘문예/단편소설당선작]「전갈은 어디로…」①

  • 입력 1996년 12월 31일 19시 20분


뱀을 보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연둣빛이 새순처럼 연하게 퍼진 가느다란 실뱀이었다. 물오른 잔디와 어울릴듯한 몸이 움직일 때마다 새끼손톱을 닮은 얼굴 아래쪽에서 섬세한 혀가 내비쳤다 사라지곤 했다. 나는 유리상자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연둣빛 몸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독을 품고 있을까. 저 환한 몸 속에 품고 있는 독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정제된 독일 것 같았다. 한낮을 지나온 늦가을 햇살이 오후의 마지막 빛을 내리쬐고 있는 시간이었다. 희귀애완동물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공원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부모를 따라 나들이 나온 아이들의 쨍쨍한 목소리가 넓은 공원에 가득했다. 공원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아이를 찾거나 부모를 찾는 방송이 단속적으로 흘러나왔다. 철제우리와 유리상자에 갇힌 동물들을 들여다보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치맛단을 휙 쓸고 지나갔다. 연둣빛 뱀을 본 것은 파충류 전시관에서였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전시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줄 끝에 가서 섰다. 게으른 동물의 움직임처럼 줄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 들어간 전시관에서 본 것은 꺼칠하고 날카로운 털이 돋은 큰 거미와 짙은 원색의 납작하게 엎드린 개구리였다. 그것들은 매끈한 유리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태연해 보였지만 끊이지 않는 사람들의 눈길에 몸을 바싹 경직시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거미와 개구리를 지나서 연둣빛 뱀을 보았다. 뱀이구나.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연둣빛 뱀은 얇게 베어놓은 톱밥 사이로 몸을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긴장의 기미는 조금도 느낄 수없었다. 마치 스피커의 방송과 아이들의 쨍쨍한 목소리로 가득 찬 소음을 벗어나 늦가을 햇살과 공원의 부드러운 공기만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독을 생각하면 맑고 투명한 한방울의 액체가 떠오른다. 독이라는 말을 맨 처음 발음해 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시골집 마당에 넓은 꽃밭을 가꾸었다. 철쭉과 도라지꽃, 키 작은 사철나무가 꽃밭에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시간을 내어 꽃밭에 나가 나무를 돌보았다. 나무를 돌보는 아버지의 입에서는 휘파람소리가 흘러나왔다. 휘파람소리는 끊일 듯 하면서도 가늘게 이어졌다. 또래 아이들과 잘 섞이지 않고 혼자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때가 절어 반질거리는 마루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아버지가 나무를 가지치거나 분재를 옮겨 심는 걸 바라보곤 했다. 아버지의 작업은 길게 이어졌다. 아버지가 나무 가꾸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버지의 표정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황홀했다. 꽃몽우리는 하루가 지날수록 두툼해져 어느 날이 되면 얇고 선명한 빛의 무수한 꽃이파리가 몸을 겹치고 여기저기서 피어났다. 때로 나는 몽우리가 터질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도라지꽃 몽우리의 몸통을 엄지와 검지로 눌러 터뜨려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굳게 닫혀 있던 몽우리가 꽈리를 물 때처럼 톡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아버지가 키우는 꽃나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백합이었다. 백합이 피어나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름다운 꽃송이를 한참동안 들여다 보았다. 언젠가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백합은 향에 독을 품고 있단다. 그 후로 백합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백합의 즙을 짜내면 꽃이파리처럼 티없고 맑은 독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개의 유리상자를 지나치다 전갈을 보았다. 작지만 강해 보이는 여섯쌍의 집게발과 예민하게 치켜세운 분절된 가느다란 꼬리를 보는 순간 전갈, 하고 속으로 짧게 외쳤다. 전갈은 단단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강한 신경독을 끌어올리는 바싹 치켜올린 날카로운 꼬리가 전갈의 작고 검은 몸에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경계를 치고 있었다. 전갈은 얼마나 오랫동안 유리상자에 갇혀 있었을까. 제 몸을 낱낱이 드러내는 햇살을 향해 독기를 뿜어내며 어서 어두운 밤이 와 어둠 속에 숨어들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갈은 햇볕이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경직된 자세로 전갈을 바라보다가 파충류관을 빠져나왔다.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공짜로 강아지를 타기가 쉬운 일이 아니죠. 자, 다른 분 안계십니까? 사회를 보는 남자 목소리가 마이크에 실려 공원으로 퍼졌다. 공원 한 쪽에 마련해 놓은 공연장 주위를 사람들이 층층이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까치발을 하고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사회자가 털이 길게 자란 애완견을 팔에 안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무대로 올라갔다. 네, 또 한분이 나오셨군요. 어떤 장기를 보여주실 거죠? 여자는 마이크를 넘겨받자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가벼운 트로트였다. 구성지고 찰진 목소리에 사람들이 박자를 맞추어 손뼉을 쳤다. 여자에게 강아지가 안겨졌다. 사회자는 다른 한마리의 강아지를 쳐들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젊은 남자가 무대로 나섰다. 새소리를 흉내내겠다고 했다. 남자는 가볍게 쥔 주먹 앞부분을 입에 대더니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삐릭 하는 새소리가 가볍게 날아올랐다. 갑자기 허벅지 안쪽에 통증을 느꼈다. 지난 봄, 일하고 있던 무역회사에서 거래처 직원들과 함께 야유회를 간 적이 있었다. 이른 시간부터 고기가 구워지고 술판이 벌어졌다. 몇몇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불렀고 결국엔 나도 부장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서게 되었다. 어이, 노래 좀 들어보자고. 사람들이 술잔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 아는 노래가 많지 않은 데다가 몇 잔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불러야 할 노래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불쑥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찔레꽃이었다. 찔레꽃 피면 내게로 온다고 노을이 지면 피리를 불어준다고 그랬지. 느리고 단조로운 노래가락에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끊었던 말을 다시 주고 받았다. 나는 산기슭에 피어있는 철쭉의 붉은 빛을 바라보며 이상한 슬픔에 사로잡혀 노래를 불렀다. 찔레꽃 피고 산비둘기 울고 저녁 바람에 찔레꽃 떨어지는데, 너는 그렇게 차가운 차가운 땅에 누워 저기 흐르는 하얀 구름들만 바라보고 있는지. 노래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가벼운 박수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야유회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이어지면서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이쪽자리로 왔다가 다시 다른 자리로 건너가고는 했다. 모처럼 야외에 나와 고기 구워먹으니 몸 보신이 되는 것 같구만. 이번 복날엔 살집 좋은 토종개 한마리 구해다 강가에 나가 단체로 몸보신을 좀 해보자구, 어때? 얼굴이 불그죽죽해진 부장의 말에 남자직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꼭꼭 누르며 종이컵에 담긴 말간 술을 들여다 보았다. 솔잎 하나가 술 위에 떠 있었다. 이런 술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옆에 앉아 있던 거래처 남자직원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솔바람차라고 솔잎을 담근 물로 만든 차가 있어요. 이건 솔바람주 정도가 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바람주, 마셔도 안 취할 것 같은 이름이었다. 부장과 남자 직원들은 몸보신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집에서 개 키워본 적 있어요? 남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시골집에서 개를 길렀죠. 토종개였는데 아주 영리했어요. 몸집이 크고 나를 잘 따랐죠. 한밤중에 오줌을 누러 깜깜한 마당에 나가면 녀석이 어느 새인지 내 옆에 서 있곤 했었어요. 내가 일을 보고 토방으로 올라설 때까지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죠. 아마 내가 혼자 마당에 있길 무서워할 거라는 걸 알았었나 봐요. 토방에 서서 가끔 녀석의 눈을 들여다볼 때가 있었는데 참 깊고 할 말이 많은 눈이었어요. 내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때까지 녀석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죠. 녀석은 우리집에서 오년을 살았어요. 늙자 힘없이 내내 토방에 웅크리고 누워 있다가 죽었죠. 나는 가마니에 녀석을 넣어 끌고 뒷산으로 올라갔죠. 양지 바른 곳에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더군요. 볕이 잘 드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녀석을 묻어 주었지요.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하얗게 피어 있던 찔레꽃이 떠올라요. 남자는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 한모금 마셨다. 아까 불렀던 노래 제목이 찔레꽃이던가요? 노랠 듣는데 녀석이 생각났어요. 그 남자, 형우는 산기슭에 핀 철쭉을 보며 말했다. 나는 형우의 말이 사박사박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자국을 남기는 걸 느꼈다. 야유회에 다녀온 며칠 후 형우는 내가 있는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우린 어디에서건 꼭 만나게 됐을 것 같지 않아요? 찻집에 앉아 형우는 말했다. 찻잔 속에 떨어지던 설탕가루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사금파리처럼 반짝 눈부시게 빛났다. 형우는 내가 일을 마칠 무렵이면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나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회식 자리에도 끼지 않고 형우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형우는 나를 보면 사소한 일들을 먼저 물었다. 점심은 무얼 먹었어요? 과도에 베인 손가락 상처는 나았어요? 나는 형우가 내게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했다. 오늘은 몇시에 일어났어요? 내가 오후에 전화할 때 무얼 하고 있었어요? 오랜 시간이 흘러도 형우는 내 앞에 앉아 사소한 일들을 물어보고 나는 그 말에 대답을 하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우리가 만난 지 몇달이 지났을 때 형우는 말했다. 우린 같이 살면 잘 어울릴 것 같아. 나는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형우는 나와 같이 살게 될 일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다. 우리가 같이 살게 되면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방을 얻자. 우리가 같이 살다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뭐라고 불러줄까? 우리가 같이 살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모든 걸 네게 가르쳐 줄게. 야구의 규칙과 몇 개의 게임. 우리가 같이 살게 되면. 나는 형우의 말을 들으며 웃기만 했다. 그런 일은 아주 멀고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형우의 말은 내 속에서 터를 일구고 살기 시작했다. 가끔씩 내 속에 살고 있는 그 말들이 얼마나 저들끼리 즐겁게 조잘거리며 부풀어 오르는지 귀 기울여 들여다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형우에게 소리내어 우리가 같이 살게 되면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우리가 같이 살게 되면 식탁에 앉아 당신이 지내온 하룻동안의 일을 언제까지고 들어줄게요. 우리가 같이 살게 되면 당신에게 부드럽고 따뜻한 아이를 낳아 줄게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우리가 같이 살지 못하게 되면, 난 어떻게 하지요? 내가 묻자 형우는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넌 내 마음만 믿고 있으면 돼. 일주일에 한번씩 형우는 내 방에서 잠을 자고 회사로 출근했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기 힘들어 하는 형우를 깨워 정류장으로 나가 나란히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어느 날 내 방에서 자고 일어난 형우는 나를 먼저 정류장으로 내보냈다. 며칠 전 아침, 회사 동료가 내가 너랑 정류장에 서 있는 걸 보았대. 아직 결혼을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비치지 않겠어? 형우는 다림질해 놓은 와이셔츠를 입으며 말했다. 형우가 내방에 오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나는 자정이 넘어설 때까지 형광등을 켜놓고 형우를 기다렸다. 바람이 창을 또독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바라보았다. 보름이 되도록 형우에게서 연락이 없자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형우는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미안해.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 나는 그 말에서 형우가 내게 하고 싶어하는 말의 기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번쯤 다시 그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회사 앞에 가서 형우를 기다렸다. 비가 조금씩 내리던 날이었다. 회사로 전화를 걸자 여직원이 퇴근했다고 일러주었다. 공중전화부스를 나와 우리가 자주 갔던 카페 근처를 걸었다. 골목이 있는 길을 지나갈 때 였다. 골목에서 막 빠져나와 내가 걷는 방향으로 향하던 누군가의 우산이 갑자기 아래로 숙여졌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상체와 다리만 보였다. 형우였다. 형우의 몸 옆에는 플레어 치마를 입은 여자의 다리가 바싹 붙어 있었다. 형우는 우산으로 여자와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돌아서서 형우와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마음 속에 갇혀 있던 말들이 일어서며 머리를 웅웅 울렸다.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부릅뜬 눈이 쓰라려올 때까지 형우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새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쪼릉쪼릉. 남자는 그게 종달새 소리라고 했다. 사회자가 남자처럼 주먹을 쥐고 입바람을 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문득 동굴속에 산다는 아프리카의 한 부족이 떠올랐다. 그들은 새소리를 내어 새를 유인해 입으로 화살을 쏘아 새사냥을 한다고 했다. 원주민의 새소리를 듣고 가까이 날아간 새들은 결국 화살을 맞고 죽어갔을 것이다. 가끔 그런 일이 있다.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예기치 않은 상대가 쏜 화살을 가슴에 맞고 오랫동안 앓으며 아파하는 것. 화살은 아주 사소한 한 마디의 말이기도 했고,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기도 했다. 남자의 팔에 강아지가 안겨지는 걸 보는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왔다. 공원에는 마른 바람이 불고 햇살은 따스했다. 눈을 감고 해를 향해 고개를 젖히다가 곧게 뻗어오는 햇살에 발이 걸려 넘어질 듯 잠깐 휘청였다. 가까운 곳에 있는 벤치에 가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히듯 어루만졌다. 오랫동안 이렇게 앉아서 볕을 쬐고 있으면 깊은 바닷속의 연체동물처럼 눈은 퇴화해버리고 내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몸이 투명해질 것 같았다. 그러면 투명해진 몸 안에서 뱉어내지 않은 말들이 서로 뒤엉켜 우르르 일어섰다가 주저앉고 다시 일어서기를 되풀이하는 모양이 보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버려 이제는 퇴색해버린 말들. 연정과 분노와 치욕과 환멸이 낳은 말들. 누구의 귀로도 흘러가지 말고 내 속에서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어라. 그 꼿꼿함이 정제된 한방울의 독을 만들 때까지. 나는 들끓는 말을 향해 중얼거렸다. 지하에 있는 내 방에서는 볕을 쬐기가 힘들었다. 창이 평지와 맞닿아 있는 데다 앞집의 담벼락이 창문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방으로 햇살이 비쳐드는 일은 드물었다.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누우면 햇빛을 받지 못한 공기가 매일 방에 조금씩 쌓여가 가슴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 방에 괴어 있는 공기를 갈아내기 위해 날마다 창문 옆에 달린 조그만 환풍기를 돌렸다. 출근을 하거나 잠을 잘 때도 환풍기를 꺼놓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라면을 끓여먹을 때, 뒤척이는 잠결에서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는 쉬지 않고 들렸다. 가을이 되면서 해가 짧아지자 지하방의 어둠도 더 짙어졌다. 불을 끄고 방에 누워 어둠을 응시하면서 나는 오래 전의 인간이 눅눅한 동굴에 몸을 눕히고서 그러했듯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음울한 소리를 두려운 마음으로 들었다. 가끔씩 창 바로 앞에서 카악하고 가래 뱉는 소리나 술마신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잠들기 전까지 나는 창 밖의 소리에 날카롭게 신경을 모으고 있다가 그런 소리들이 들릴 때마다 허공을 노려보았다. 누군가가 나를 꾹꾹 짓밟고 있는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언젠가 술마신 사내가 지하로 향하는 층계를 내려와 내방으로 통하는 문을 함부로 두들긴 적이 있었다.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철제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소리는 한밤중의 정적 속에서 크고 조급하게 이어졌다. 잠시 후 질퍽하게 취한 사내의 굵은 소변줄기 소리가 들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놀란 가슴의 방망이질은 가라앉지 않았다. 따닥따닥 정확한 획을 그으며 돌아가는 시계초침 소리에도 가슴이 움찔거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려움이 차츰 가라앉자 그 자리에 분노가 스멀거리며 차오르기 시작했다. 분노는 빠르게 부풀어올라 머릿속을 꽉 메웠다. 발작적으로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나를 짓밟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웅크리고 엎드린 채 숨이 막혀 얼굴에 피가 몰릴 때까지 베개에 코와 입을 깊이 파묻고 있었다. 무엇을 참고 있는가. 한참 후 고개를 들고 바라본 거울안에 붉게 상기된 얼굴이 입을 굳게 다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참고 있는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며 되물었다. 술취한 사내가 방을 두드리던 날, 그날은 혼자 병원에 가 형우의 아이를 지우고 온 날이었다. 두달이 넘어서도록 월경이 비치지 않자 병원에 찾아갔다. 임신입니다. 흰가운을 입은 여의사가 말했다. 수술을 하실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다녀온 며칠 동안 회사의 일을 마치고 난 뒤 시내와 동네의 골목을 혼자서 걸어다녔다. 왠지 자꾸만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거리를 걸으며 내게로 와서 몇 달밖에 살지 못하고 갈 아이를 생각했다. 아이는 이물감과 두려움, 죄책감의 다른 이름이었다. 여의사가 정해준 수술날짜를 며칠 지나 병원으로 갔다. 수술을 마치고 수술대에서 내려서자 덜 깬 마취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복도의 흰 벽들이 내게로 와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무너져 버려라, 무너져 버려라. 웅얼거리며 벽 앞에서 비틀거렸다. 간호사가 다가와 내 팔을 잡고 회복실로 데려갔다. 회복실에서 링거주사를 꽂고 모로누워 톡톡 떨어지는 투명한 액체를 바라보았다. 한때 내 안에서 숨쉬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따뜻함들, 작고 부드러운 아이나 사려깊은 입맞춤은 수술대에서 차가운 메스로 잘려졌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거다. 병원의 회복실을 빠져나온 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밥집에 들어가 육개장 한그릇을 시켜 마지막 숟가락까지 입에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고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해냈다. 변기에 고여 있는 토사물을 바라보며 치욕에게도 색깔이 있다면 바로 저 토사물의 색깔과 같은 붉은빛일것이라고생각했다. 병원에 다녀온 후로 가끔씩 허벅지 안쪽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버스를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다, 쌀을 씻다가 불현듯 찾아드는 짧고 날카로운 통증에 몸을 웅크렸다.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곧 지나갈 겁니다. 가끔 신경성이나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그런 신호를 보내기도 하거든요. 나는 의사의 말처럼 생각하려했다. 곧 지나갈 거야. 모든 일이 그렇듯이 몸의 통증도 시간이 지나면. 벤치에서 일어나 공원을 걸었다. 공원에서 마주친 아이들의 손에는 금붕어가 들어있는 투명한 비닐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금붕어는 금방이라도 비닐봉지 밖으로 튀어오를 듯 생기있게 지느러미를 흔들며 좁은 봉지 속을 휘젓고 다녔다. 금붕어의 힘찬 몸짓을 바라보다가 아이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금붕어 어디서 샀니? 아이는 손가락으로 공원의 위쪽을 가리켰다. 저기에 가면 공짜로 금붕어를 나눠주는 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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