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동아신춘문예/단편소설당선작]「전갈은 어디로…」①

  • 입력 1996년 12월 31일 19시 20분


뱀을 보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연둣빛이 새순처럼 연하게 퍼진 가느다란 실뱀이었다. 물오른 잔디와 어울릴듯한 몸이 움직일 때마다 새끼손톱을 닮은 얼굴 아래쪽에서 섬세한 혀가 내비쳤다 사라지곤 했다. 나는 유리상자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연둣빛 몸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독을 품고 있을까. 저 환한 몸 속에 품고 있는 독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정제된 독일 것 같았다. 한낮을 지나온 늦가을 햇살이 오후의 마지막 빛을 내리쬐고 있는 시간이었다. 희귀애완동물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공원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부모를 따라 나들이 나온 아이들의 쨍쨍한 목소리가 넓은 공원에 가득했다. 공원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아이를 찾거나 부모를 찾는 방송이 단속적으로 흘러나왔다. 철제우리와 유리상자에 갇힌 동물들을 들여다보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치맛단을 휙 쓸고 지나갔다. 연둣빛 뱀을 본 것은 파충류 전시관에서였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전시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줄 끝에 가서 섰다. 게으른 동물의 움직임처럼 줄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 들어간 전시관에서 본 것은 꺼칠하고 날카로운 털이 돋은 큰 거미와 짙은 원색의 납작하게 엎드린 개구리였다. 그것들은 매끈한 유리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태연해 보였지만 끊이지 않는 사람들의 눈길에 몸을 바싹 경직시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거미와 개구리를 지나서 연둣빛 뱀을 보았다. 뱀이구나.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연둣빛 뱀은 얇게 베어놓은 톱밥 사이로 몸을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긴장의 기미는 조금도 느낄 수없었다. 마치 스피커의 방송과 아이들의 쨍쨍한 목소리로 가득 찬 소음을 벗어나 늦가을 햇살과 공원의 부드러운 공기만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독을 생각하면 맑고 투명한 한방울의 액체가 떠오른다. 독이라는 말을 맨 처음 발음해 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시골집 마당에 넓은 꽃밭을 가꾸었다. 철쭉과 도라지꽃, 키 작은 사철나무가 꽃밭에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시간을 내어 꽃밭에 나가 나무를 돌보았다. 나무를 돌보는 아버지의 입에서는 휘파람소리가 흘러나왔다. 휘파람소리는 끊일 듯 하면서도 가늘게 이어졌다. 또래 아이들과 잘 섞이지 않고 혼자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때가 절어 반질거리는 마루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아버지가 나무를 가지치거나 분재를 옮겨 심는 걸 바라보곤 했다. 아버지의 작업은 길게 이어졌다. 아버지가 나무 가꾸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버지의 표정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황홀했다. 꽃몽우리는 하루가 지날수록 두툼해져 어느 날이 되면 얇고 선명한 빛의 무수한 꽃이파리가 몸을 겹치고 여기저기서 피어났다. 때로 나는 몽우리가 터질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도라지꽃 몽우리의 몸통을 엄지와 검지로 눌러 터뜨려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굳게 닫혀 있던 몽우리가 꽈리를 물 때처럼 톡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아버지가 키우는 꽃나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백합이었다. 백합이 피어나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름다운 꽃송이를 한참동안 들여다 보았다. 언젠가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백합은 향에 독을 품고 있단다. 그 후로 백합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백합의 즙을 짜내면 꽃이파리처럼 티없고 맑은 독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개의 유리상자를 지나치다 전갈을 보았다. 작지만 강해 보이는 여섯쌍의 집게발과 예민하게 치켜세운 분절된 가느다란 꼬리를 보는 순간 전갈, 하고 속으로 짧게 외쳤다. 전갈은 단단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강한 신경독을 끌어올리는 바싹 치켜올린 날카로운 꼬리가 전갈의 작고 검은 몸에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경계를 치고 있었다. 전갈은 얼마나 오랫동안 유리상자에 갇혀 있었을까. 제 몸을 낱낱이 드러내는 햇살을 향해 독기를 뿜어내며 어서 어두운 밤이 와 어둠 속에 숨어들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갈은 햇볕이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경직된 자세로 전갈을 바라보다가 파충류관을 빠져나왔다.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공짜로 강아지를 타기가 쉬운 일이 아니죠. 자, 다른 분 안계십니까? 사회를 보는 남자 목소리가 마이크에 실려 공원으로 퍼졌다. 공원 한 쪽에 마련해 놓은 공연장 주위를 사람들이 층층이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까치발을 하고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사회자가 털이 길게 자란 애완견을 팔에 안고 사람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