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의 세상읽기]김치없으면 정말 못살아

  • 입력 1996년 12월 6일 19시 57분


지난주 몇년만에 우리 세자매가 로스앤젤레스에 모여 미국서부구경에 나섰다. 여러날 버스를 타고하는 관광인데 유머러스한 멕시코인 운전사는 우리랑 친해지자 이런 무시무시한 농담을 한다. 『한국 사람은 죽이기 쉬워요』 『어떻게요?』 『김치 한 이틀만 안 먹으면 죽잖아요』 우리 일행이 한끼도 거르지 않고 김치 먹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주로 한국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피치 못해 미국 식당에서 양식을 먹을 때에도 한국인 가이드는 준비해온 김치를 꺼내 놓았다. 『내가 김치를 이렇게 밝힐줄은 몰랐어요』 같이 갔던 여대생의 수줍은 고백이다. 『양식 먹고 김치 안먹으면 속이 울렁거려』 할아버지의 말씀이시다. 나는 다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여행의 일부인데 한국인들은 해외관광을 하면서 고집스럽게 한국음식만 찾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관광단에 끼어 미국식당에서 냄새 피워가며 떳떳하게 김치를 먹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 뿌듯한 기분도 든다. 그랜드 캐니언 가는 길에 있는 이 식당에선 몇년전까지는 김치를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이드들이 몰래 김치를 숨겨 들어와 나누어 주다가 쫓겨나기도 했는데 그러면 우리 관광객들은 의기투합하여 빵을 사다가 손수 김치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호기심으로 조금씩 김치를 먹어보던 이 식당주인과 종업원들이 어느새 맛을 알게 되어 이제는 「김치 중독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온 마을에 김치를 소개하는 「김치전도사」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한다. 얼마동안 해외시장에서 맵고도 개운한 원조 한국김치가 들쩍지근한 일본산 사이비 기무치에 맥을 못추었는데 애틀랜타 올림픽이후 상황이 상당히 호전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제 김치는 명실공히 세계인이 함께 즐겨 먹는 우리의 음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나라안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김치인데다 젊은 엄마들은 아예 김장을 담그지 않는다는 등 김치가 홀대당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 전통을 잃어가는 현상이라며 염려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도 나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십중팔구 우리 일행처럼 김치없이는 못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 그 멕시코 운전사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여행중에도 왜 꼭 김치를 먹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았다. 『객지에서 죽기 싫으니까』 한 비 야〈오지여행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