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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3월 29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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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사람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생활의 터전을 제공해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지만 때로는 사람을 압도하고 보잘것없게 만드는 폭군이 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 자바섬 동부 해발 2200m 높이에 형성된 직경 10㎞의 거대한 분화구인 칼데라 ‘모래의 바다(sea of sand)’. 그 대분화구의 한가운데서 또다시 우뚝 솟은 분화구를 통해 거친 숨을 몰아쉬는 브로모 화산(해발 2393m)도 원주민 텐거족에게는 그런 존재인 듯했다.》
동부 자바의 주도 수라바야에서 자동차로 2시간반.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브로모 화산 근처까지 올라갔다. 정확한 명칭은 ‘브로모-텐거-수메르 국립공원’. 평균기온이 27도를 오르내리는 열대 인도네시아에서도 산 정상은 3도에서 18도를 오르내리는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브로모의 검붉은 여명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모래의 바다’를 낳은 대분화구 바깥쪽 작은 여관들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산행을 시작한다. 새벽 3시경, 칠흙같은 어둠속에 대분화구의 산등성이를 내려가 부드러운 먼지와도 같은 ‘모래의 바다’를 1시간 정도 걷다 보면 동화속 그림같은 힌두사원을 발치에 둔 브로모의 밑둥에 다다른다. 온천지에 매캐한 유황냄새가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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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개의 계단을 올라 분화구 가장자리에 도착한 4시반경. 동쪽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자 분화구 가장자리에서 일출을 기다리던 관광객들이 탄성을 올린다. 브로모화산을 중심으로 위도다렌봉(2614m), 바톡봉(2440m) 등 인접한 봉우리들이 자태를 드러낸다. 멀리 자바섬 최고봉인 수메르 화산(3676m)의 분화구에서도 허연 연기가 내뿜어진다.안개 밑으로 드러나는 울퉁불퉁한 산악지형이 신비감을 자아낸다. 원주민 텐거족은 이곳을 ‘신의 산’이라 부른다.
“꽃다발을 분화구에 던지면 소원이 이뤄집니다.”
새벽 5시반경. 일출과 동시에 긴장이 풀어진 분화구 정상에서 남루한 차림의 원주민이 다가와 꽃다발을 내민다. 술리어노(40)는 20km 떨어진 집에서 자정에 출발해 5시간을 걸어왔단다. 그가 내미는 꽃다발은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희귀종인 에델바이스다.
한다발 5000루피아(약 600원). 소작농이며 두딸과 부인(30)과 함께 산다는 그가 이날 판 꽃다발은 겨우 세개다. 같은 마을 사람 3명과 함께 왔다는 그는, ‘장사’가 끝나면 다시 5시간을 걸어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5000여 텐거족은 해발 1900m에 자리한 냐디사리 마을, 해발 2100m의 츠마라라왕 등 5개의 마을에 각기 1000여명씩 한 부락을 이뤄 살고 있다.
고산지대 사람들에게 가난은 천형과도 같은 것일까. UN이 2002년을 ‘산의 해’를 정하게 된 배경에는 지속가능한 산림개발을 통해 산과 사람이 공존하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취지외에도 이들처럼 산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세계 인구의 10%가 생존이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는 위기의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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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텐거족은 “산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교육수준이 낮은 원주민들에게 산은 유일한 수입원이다. 이들은 산비탈에서 양배추 감자 양파 땅콩 등을 재배하고 주말이면 하루 수백명, 평일에는 백명이 채 안되는 관광객들을 위해 지프차나 조랑말을 끌고, 혹은 꽃다발을 들고 밤새워 브루모 화산을 찾는다.
산은 이들에게 농지를 제공했지만 45도 경사의 가파른 산비탈이 대부분이다. 브로모봉 주변에서는 해발 2200m 지점까지 경작이 이뤄지고 있다. 경사가 급한 곳일수록 나무를 심어야 산사태와 홍수 등에 대비할 수 있으나 당장의 식량확보가 더 급하기 때문이다.
밭에서 씨감자를 파내던 리린(20)과 루스미아띠(50) 모녀는 “땅이 모자라 어디건 농사를 짓는다”고 말한다. “위험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다.
1982년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초등학교가 생겨 젊은이들은 기초교육을 받았지만 인구중에는 문맹도 적지 않다.
이처럼 브로모 산은 텐거족에게 신과 같은 존재이자 삶의 터전이다. 두렵지만 떠날 능력도 용기도 없다.
“산을 좋아하고 산에서 사는 법밖에 배우지 못했지만 가능하다면 도시로 나가 일자리를 얻고 싶다”던 중년의 ‘꽃파는 아저씨’ 술리어노의 퀭한 얼굴이 그가 딛고 선 거대한 산의 역설적 존재감을 무엇보다 실감나게 말해주고 있었다.
동자바주(인도네시아)〓서영아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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