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동서양 미술관을 통째로 훔쳤다 '아트 앤 아이디어'

  • 입력 2001년 11월 16일 18시 19분


◇ 아트앤 아이디어(총 6권)/비드야 데헤자등 지음/각권 450쪽 내외 각권 29000원 한길사 한길아트

“술 부대는 처음 담은 술의 향기를 기억한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격언이다.

처음 미술사학의 포도 묘목을 인문주의의 토양에다 심은 건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 전기를 쓴 바사리였다. 포도를 재워서 술을 담근 지 500년. 재워둔 술맛이 잘 익었다. 꼭지가 핑글 돌만큼.

영국 파이돈 출판사가 인류의 기억에다 고무줄을 칭칭 감아서 밀봉해둔 미술의 묵은 향기를 개봉했다. ‘아트 앤드 아이디어’ 기획이다. 그리고 한길사에서 우리말로 옮겼다. 향후 10년 동안 400∼500쪽 분량 짜리를 140권쯤 꾸역꾸역 낸단다. 겁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조폭 마누라가 알았더라면 ‘형님!’ 하면서 재단 가위를 반납하지 않았을까? 일차 분 6권이 연말을 안 넘기고 먼저 나왔다.

‘그리스 미술’ ‘인도 미술’ ‘인상주의’ ‘다다와 초현실주의’ ‘고야’ ‘달리’ 편이다. 코끝이 매캐하면서 목젖이 몹시 울렁거린다.

‘아트 앤드 아이디어’는 기획 목록만 봐도 기가 질린다. 고대 이집트의 곰팡내 물씬 나는 미라부터 시작해서 이성과 종교가 모두 미쳐서 돌아가던 초현실주의까지 동서고금의 미술의 미자가 붙은 건 죄다 싹쓸이했다. 이래 가지고는 연근해 멍텅구리 배 한 척에 목숨을 건 어리숙한 미술사가들은 앞으로 생계가 걱정된다. 이삭패기나 한 톨씩 주우며 연명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다. 50년 미술사학의 알토란같은 연구성과들을 알뜰살뜰 담아놨으니까. 사실 철학이나 신학, 경제학이나 정치학처럼 나잇살도 들고 힘깨나 쓰는 깍두기들 눈치 보느라 학문의 밥그릇 수가 모자란 미술사학은 학계나 어디서나 얼마나 홀대를 당했던가! 도저히 독립 학문으로 홀로 서기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던 미술사학이 아장걸음을 걷나 싶더니 어느새 어엿하게 성장했다. 이제 누구한테 시집가더라도 지참금 걱정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리즈는 집필진에도 신경을 썼다. 미술분야에서도 최고의 블루칩이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민다.

어차피 미술의 가갸거겨를 뗀 고급 교양독자를 겨냥하긴 했지만, 그 분야의 연구성과만 내쳐 자랑하지 않고 집필자의 비판적 관점도 유지하려고 애썼다. 속이 꽉 찬 배추에다 자기만의 비법으로 양념 속을 다져 넣었다. 이런 자세는 우리도 배울 만하다. 내 주장만 당근 옳고 다른 주장은 시래기 취급하는 책들이 얼마나 흔한가.

‘아트 앤드 아이디어’에서 특히 돋보이는 건 켜켜이 들어 있는 그림이다.

한 마디로 그림책다운 그림책이다. 아니, 그림책이 아니라 미술관을 통째로 훔쳐 놓았나 싶다. 책장 갈피마다 투명한 유리창을 끼워 놓아서, 보다가 콧김이 서리면 어쩌나 괜히 걱정스럽다. 뽀드득 소리 나는 유리창 뒤로 거장들 붓이 손바람 소리를 내면서 달린다. 옹이 촘촘한 단풍나무 패널하며, 박박 갈아서 호두기름에 섞은 안료 냄새가 코끝에 찡하다. 혹시 창조주가 인쇄공장에 취직한 게 아닐까? 무지개를 녹여서 시료로 쓰는 인쇄공장에.

노성두(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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