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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6월 14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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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천국의 신화’를 봤지만, 검찰이 일부 수간(獸姦) 장면과 동물과 인간의 잔혹한 싸움 장면에 ‘음란성’ 혐의를 걸어 무리하게 기소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과 함께 답답함을 느꼈었다.
1992년에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가 출판되자 서울지검 특수부가 나서서 작가와 출판인을 음란문서 제조 및 반포혐의로 긴급 구속했다. 일반인들은 몰랐겠지만,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피의자들의 보석 신청을 기각하며 ‘국가적 사안이므로 국가정책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어 이에 병보석 및 금보석을 기각한다’라는 과장된 구실을 달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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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다시 외설-예술 논쟁을 일으키면서 작가가 법정 구속됐고, 같은 작품을 영상으로 옮긴 장선우의 영화 ‘거짓말’ 역시 한바탕 소동 끝에 무혐의 판정을 받았었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는 한 사회에서 성적 에너지가 과도하게 억압될 때 신경증과 히스테리가 급증한다고 지적했다. 성 억압은 한 사회의 내면을 좀먹는 신경증과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그 끝은 결국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이 가장 폐쇄적이고 억압적이었던 시대는 박정희가 통치하던 1970년대였다. 그때 근엄한 권력자들은 ‘오입’은 커녕 ‘섹스’를 한번도 안하고 평생을 지낼 것같은 표정으로 국민의 성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수시로 밀실에 젊은 여자들을 불러들여 ‘성(性)의 향연’을 즐겼다는 사실이 이 독재자가 측근에게 살해되면서 만천하에 폭로됐다.
얼마전 법무장관 임명 취소 소동이 떠오른다. 안 모라는 인물의 세칭 ‘충성 문건’은 그가 왕조 봉건시대의 신하와 한치도 다를바 없는 마인드의 인물임을 폭로한다. 그런 권력의 한심한 마인드에서 예술과 외설에 대한 ‘자의적 기준’들이 창안되는 것이다. 그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전근대성이 아니라 이중적 도덕기준, 그리고 위선과 음란의 징후다.
아직도 영화에서 남녀의 성기는 물론이고 체모가 한가닥이라도 비치면 공연윤리위원회의 서슬 퍼런 심의의 가위가 즉각 작동된다. 누구나 갖고 있는 성기와 체모는 보아서도 안되고 보여져서도 안된다.
왜 ‘몸’이나 ‘성’에 대해 ‘국가적 사안’이라는 어마어마한 명분을 들이대면서 과민 반응을 보이는가. 왜 성을 표현한 문학과 영화, 미술작품 등에 대해 폐쇄적인 검열과 규제의 잣대를 들이대며 억압하려만 드는가. 왜 벗으면 안되는가. 왜 그것을 쓰거나 그리면 안되는가. 그러면 우리 사회가 더 음란해지고 ‘무법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확정적인 증거라도 있는가.
이제는 자의적 검열 기준을 들이대며 창작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위선과 기만의 논리를 벗어던져야 한다. 저 관직 퇴물들과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쁜 교수들에게 혈세를 지급하며 운영하는 일체의 관변 검열단체나 심의기구 따위는 당장 없애버려야 한다.
그러면 음란영화, 음란만화, 음란소설이 들끓을 것이라고? 우리 사회의 시민과 시민단체들의 자율적 규범, 그 자정과 비판기능이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것이 한낱 기우(杞憂)에 불과했음이 곧 드러날 것이다.
‘청소년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예술 창작품들에 대해 소아병적인 윤리의식의 잣대를 들이대며 예술가들이 누려야 할 창작의 자유를 옥죄면 안된다. 무조건적인 성의 억압이 우리 사회를 ‘도덕적 청정지대’로 만들 것이라는 환상은 이제 그만 버려야 한다.
창의적 정신이 문화와 경제 모두에 걸쳐 중요한 자원인 시대가 됐다. 따라서 이를 가로막는 규제와 억압은 사회전반의 창조력과 생산력을 억제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자유로운 창작 정신의 구현이 곧 우리 사회의 잠재적 재화일 수도 있다면 이에 대한 법률, 행정기준은 ‘최소 개입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너무 과도한 방부제는 해롭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창작의 자유을 제한하고, 우리 내면의 근원적 창의성과 미적 감각마저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일반 시민들의 예술 향유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행복추구권에 족쇄를 채울 뿐이다.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