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재호/'Ph.D. 권력'

  • 입력 2001년 5월 13일 18시 53분


'실력 없는 교수는 퇴출되어야 한다'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7일 청와대 발언을 놓고 교수 사회가 끓고 있다고 한다.

김대통령은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잡지에 논문 하나 제대로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10년, 20년 전 노트를 가지고 계속 강의하는데 어떻게 교육이 발전하겠는가"라고 했는데 상당수 교수들이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의 지적이 반드시 틀린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학술정보 전문기관인 ISI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 교수들의 논문 1편당 피인용도는 0.17로 세계 61위라고 한다. 실력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돼 있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교수사회에다 대고 "10년, 20년 전 노트…" 운운한 것은 지나친 듯하다. '퇴출'을 거론하기에 앞서 대학의 열악한 연구환경부터 걱정했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사회에서 교수의 역할과 영향력은 독특하고도 크다. 그들은 사회 전 분야에서 일종의 향도(嚮導)역할을 한다. 정치가 잘못돼도, 경제가 나빠져도, 남북관계가 삐그덕거려도 사안을 규명하고 처방을 해주는 것은 항상 그들의 몫이다.

자연히 사회적 지위도 높을 수 밖에 없다. 널리 존경받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현실세계에 뛰어들 수도 있다. 웬만큼 이름이 알려지면 어렵지 않게 장관도 될 수 있다. 단숨에 총리가 된 사람들도 많다.

교수라고 해도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통칭 미국 박사, 즉 Ph.D.(Doctor of Philosophy)래야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 흔히 사회적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고시(考試)를 으뜸으로 쳤지만 Ph.D.가 고시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기이한 것은 다른 나라 대학 출신들은 대개 뒷전으로 밀린다는 것이다. 학문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어느 곳에서 건 열심히만 하면 될텐데 이게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Ph.D 권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문화 권력'이나 'NGO 권력'처럼 Ph.D. 사회도 이미 권력화됐다는 뜻에서 만들어 낸 조어(造語)인데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근대화와 학문 발전에 Ph.D.들이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이 순간도 많은 Ph.D.들은 한 편의 좋은 논문을 위해 하루 24시간을 분초로 나누어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h.D. 사회가 한국적 패거리 문화와 결합해 집단화, 권력화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면 심각한 문제다. 요즘엔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젊고 유능한 Ph.D.들도 자리가 없다고들 하지만.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한 지방대학의 한 정치학과 교수는 "국내 대학교수의 70% 이상이 미국 박사로 이들이 학문의 피가름과 근친상간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한국 사회에서 영원한 이단자로 살기로 작정하지 않는 한 막강한 'Ph.D. 권력'과 싸워 이길 사람이 있을까. 김대통령부터가 정권 창출과정에서 이들에게 크게 의존하지 않았던가. 내년 대선을 노리는 예비 주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향도라 할 교수 사회 이면에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재호기자>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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