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번역사 산책

  • 입력 2001년 1월 26일 19시 03분


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발전된 이웃 문화를 배우거나 혹은 고대 언어로 된 고전을 읽는 데에는 결국 번역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저명한 번역가인 유르나르스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읽는 것의 4분의3은 번역물이다. 성서와 불경,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작품, 공자와 노자의 사상 등 고전의 대부분은 번역을 통해 접하게 된다.

그러므로 독창적인 발전 이전에 우선 남의 것을 배우는 번역의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대작가들로 알고 있는 뒤마, 위고, 볼테르, 루소, 지드 등도 모두 번역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들은 이런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번역과 관련된 문제들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에세이다. 심오한 학술적 내용을 담고 있는 연구서는 아니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읽어 내려가면서 역사상 중요한 내용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우선 고대와 중세 이래 중요한 번역의 사례들을 살펴보고, 근대 이후의 시기에는 프랑스로 시각을 좁혀 몇몇 번역가들의 구체적인 일생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보인다. 그러는 한편 이 조사를 진행하면서 겪었던 일들과 그에 대한 소회까지 소상히 기록한다. 그러다보니 산만한 느낌도 들지만 번역이라는 중요한 문화 현상에 대해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특히 주목하게 되는 점은 문화가 크게 창달되기 직전에는 대개 ‘번역의 세기’라 부르는 시기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중세 기독교 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하기 전 시대인 12세기, 그리고 근대 유럽 문화가 본격적으로 피어나기 전의 준비기간에 해당하는 16세기가 그런 시대였다.

이런 시점에서 번역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문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읽기 쉽게 ‘의역’ 혹은 ‘번안’할 것인가? 번역과 관련해서 언제나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런 문제가 때로 그 시대 문화 전반의 핵심 사항이 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 문학의 소위 신구(新舊) 논쟁이다.

고전 문화가 더 우월한가, 아니면 당대의 문화가 더 발전한 것인가 하는 이 논쟁은 근대 서구 문명의 핵심적 특징인 진보 개념의 확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논쟁이다. 그런데 그 뒤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원문 그대로 번역해야 하는가 아니면 과감하게 축약 번역하는 것이 나은가 하는 번역 논쟁이 매개되어 있었다.

번역이 이처럼 중요한 문제이지만 ‘번역자’는 대개 그늘에 가린 존재였다. 번역물은 학자의 업적으로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했던 우리 학계의 오랜 관행이 그 증거의 하나이다. 번역의 중요성, 번역의 기준과 평가, 번역자들의 지위 등 이 책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은 ‘번역의 시대’를 맞이한 우리 사회와 문화가 곰곰히 생각해 볼 주제들이다.

주 경 철(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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