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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월 22일 16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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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 은은한 밑불'▼
신사(辛巳)년 뱀의 해 설이다. 연휴를 맞아 이미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았거나 찾아가고 있을 게다. 경제가 어려워져 서울의 귀성 인구가 지난해보다 10% 이상 줄어든 370만명에 그칠 것이란 소식도 들리지만 그래도 서울 인구의 4분의 1이 넘게 고향을 찾는 셈이다. 하기야 언제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길바닥에 시간 버리고 돈 버리면서 꼭 고향을 찾아야만 하느냐는 말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고향찾기를 경제적 효율성으로만 잴 일은 아니다. 힘들고 불편하고 짜증남을 마다하고 먼 길을 달려가는 데는 돈이나 시간으로만 따질 수는 없는 그 어떤 ‘고향의 힘’이 있을 터이다.
소설가 오정희(吳貞姬)님은 고향이란 ‘반드시 태를 묻을 곳을 이르는 것만이 아닌, 마음 깊숙한 곳에 따뜻하고 은은한 밑불처럼 묻어두고 있는 어떤 장소, 어떤 공간, 어떤 시간, 어떤 마음들, 그래서 언제나 그리운 것’이며 가족이란 ‘애증을 분별할 수 없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의 원류이고 또한 가장 아프고 민감한 속살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 고향이란 우리 마음속의 정서적 공간이다. 그 마음의 공간에서 ‘민감한 속살’들이 모여 감싸고 다독이고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고 그것을 다시 치유하며 한 울타리 안의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리라.
한 울타리 의식은 소중하다. 그것은 개개인의 정체성의 바탕이자 사회를 이뤄나가는 기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울타리의 사적(私的) 또는 집단의식이 공적(公的) 이해로 넓혀지고 수렴되지 못할 때 그것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적대적 분열을 초래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망국적(亡國的) 지역주의’는 한 울타리 의식이 지역집단화하고 그것이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부풀려지고 악용되면서 개개인의 의식 속에 절대가치로 내면화된 최악의 결과다.
허구한 날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우리 탓보다는 너희 탓이 크다며 삿대질만 해대서는 이 지역감정의 ‘악마적 주술’에서 풀려날 수 없다. 특정지역이 특정정당에 몰표를 주고 몰표를 받은 정당은 별수 없이 특정지역의 정서에 기대고 영합하고 부추기면서 이른바 대권을 노리는 이 치명적인 후진정치의 사슬을 끊지 못해서는 국민통합도 나라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여야(與野)가 죽기살기 식 상극(相剋)의 정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밑바닥에는 기실 지역집단간 ‘참을 수 없는 불신의 무거움’이 깔려있는 게 아닌가. 이 불신의 족쇄를 풀어야 한다. 당장은 풀리지 않더라도 풀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노력해야 한다.
▼'악마의 주술'녹여낼 용광로▼
누가 풀 것인가. 정치인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 대다수에게 지역감정은 권력을 잡거나 의원배지를 달 수 있는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무기였을 뿐이다. 주권자인 우리가, 국민이 풀어야 한다. 어떻게 풀 것인가. 우선 상대의 생각이나 처지를 먼저 이해하려고 애를 써보자. 적어도 ‘무조건 싫다’는 소리는 하지 말자. ‘우리 집 아이가 잘 되어야 덕도 본다’거나 ‘우리가 남이가’ 따위의 소리에 더는 맞장구치지 말자. 도대체 그런 소리에 맞장구를 쳐서 그동안 무슨 덕을 얼마나 보았는지 곰곰 따져볼 일이다.
나라 망치는 지금의 지역당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개헌도 정계개편도 피할 일은 아니다. 단 정략으로는 안된다. 지역을 넘어서는 유권자의 힘으로 이뤄내야 한다. 어렵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설은 ‘여론의 용광로’라고 한다. 이 용광로에서 지역감정을 녹여낼 불꽃을 지필 수만 있다면 그 여론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뱀이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듯이.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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