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37)

  • 입력 1998년 8월 30일 20시 11분


제2장 달의 잠행⑬

당신은 게임을 하게 될 거요. 달리 할 일이 없을테니까. 인생은 낭비하라고 주어진 게 아니지.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는 방법은 무슨 짓이든지 하는 거요. 아니면 아무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냉소적이고 이기적인 어투여서 더욱 진지해 보였다.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아연하게 쳐다보았다. 모욕당하는 기분이었다. 숲에서 우리는 두 그루의 나무나 두 마리의 산새처럼 다정하기도 하고 무심하기도 한 모습으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내가 그랬듯이 그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순수하리만치 완전히 텅 비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때문에 숲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와 나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그의 몸과 나의 몸을 그의 가난과 나의 가난을… 그것은 최면술에 걸린 시간처럼 내 생의 상처를 마취시킨 시간이었다. 아마도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단 하나 아픔을 건너갈 마취가 필요할 때가 아닐까. 일어설 때 우리는 마주 보았고, 그리고 동시에 미소 지었었다. 나는 우리가 은밀하고도 무척 특별한 정서적 경험을 했다고 느꼈다.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면 한결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숲에서의 그 시간에 대한 특별한 유대의 암시도 없이, 내 삶을 냉소하는 태도로 게임을 신청하고 있었다. 송진 냄새가 나는 눈이야, 라고 친밀해진 감정을 피력하기는 했던가… 그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절대로 자신이 질 리가 없다는, 결코 나를 사랑하게 될 리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구름 모자, 그것은 나에겐 관념의 현실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내가 뿌리 내리고 있는 이곳, 어쩌면 내가 있다고 허황하게 믿는, 그래서 한 발자국도 옮겨 볼 수 없는 이 곳. 잠으로 가득한 나의 생… 모자를 벗어 던지는 그 순간 나는 이곳이 아닌 저 곳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달라진다. 마술처럼, 그러나 너무나 비극적인 마술처럼 이곳과 마찬가지로 그 곳 역시 아무 곳도 아닌 곳에… 만약 내가 게임을 시작한다면 그와는 달리, 지기 위해서 일 것이었다. 내가 게임에 질 수만 있다면, 만약 나의 생에서 누군가를 사랑하여 눈 앞이 캄캄해지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래서 내가 사랑의 광기에 휩싸여 머리 위에 씌워진 관념의 현실인 그 구름모자를 벗어 던질 수 있다면….

나는 그를 만났던 날 이후로 거의 매일 그 휴게소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절 안내 표지판을 지나 아름드리 은행나무 가로수를 지나면 고갯마루 휴게소가 나왔다. 오후에 수를 학교에서 데리고 오다가도 들러 팥빙수따위를 먹고 휴게소의 등나무 그늘이나 잔디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왔다. 휴게소 집 딸이 수와 한반 친구여서 둘이 만나면 잔디밭을 데굴데굴 구르며 좋아했다.

나는 딸애와 수와 술래잡기 놀이를 하거나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하며 놀았고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사주러 가게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내가 말을 걸거나 인사를 해도 휴게소 여자는 번번히 묵살했다. 그 여자는 늘 바쁘게 보였으며 근본적으로 몹시 퉁명스러운 여자 같았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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