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구독 51

추천

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5-06-15~2025-07-15
칼럼40%
언론27%
지방뉴스10%
선거7%
사회일반7%
문화 일반3%
인사일반3%
기타3%
  • [고양이 눈]꿀벌의 노동

    따가운 햇빛 아래 해바라기 꽃이 만개했습니다. 그 위로 꿀을 모으려는 꿀벌들이 날아듭니다. 꿀벌을 보며 배웁니다. ‘더워도, 일은 해야죠.’ ―경기 안성팜랜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일 전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인사동, 폭우의 기억…널빤지와 냄비로 지켜낸 마루[청계천 옆 사진관]

    ■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5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서울 인사동 모습입니다. 서울에 내린 폭우에 완전히 잠겨 버린 거리 모습입니다. 한강과도 떨어져 있는 서울 도심이 물에 잠겨 버린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920년대 초반, 서울 인사동은 매년 여름마다 하늘이 뿌리는 재난 앞에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총독부의 수도 행정은 정비되지 않았고, 한양 도성 안쪽을 관통하던 하천과 하수 시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인사동은 한강이 불어날 때마다, 그리고 폭우가 쏟아질 때마다 가장 먼저 물이 차오르는 동네였습니다. 1920년도와 1926년에도 인사동이 침수되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 1920년 8월 — 참혹했던 한여름의 장대비1920년 여름, 인사동은 말 그대로 ‘물에 잠겼다’. 3차례에 걸친 장대비에 경성 전체가 수해를 입었고, 이촌동, 교동, 묘동, 파고다공원 아래 일대는 해수면보다 낮았던 탓에 유난히 피해가 심했다. “좁은 개천이 일시에 넘쳐” 인사동으로 “좌우로 밀어닥쳤고,” 골목과 상점, 대문과 부엌까지 순식간에 붉은 흙탕물에 잠겼다.물결은 개울을 따라 흐르지 않고 집 안 마루까지 올라왔고, 사람들은 냄비 조각이나 양철통을 들고 물을 퍼내느라 혼이 빠졌다. 시내를 다니던 전차가 완전히 두절되고 경의선과 경부선 철도와 전신까지 불통되었으므로 경의선 경원선 방면의 통신 두절로 강원도와 경기도 각 지방의 수해가 어떤 상황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인사동뿐 아니라 인접한 낙원동, 재동, 계동, 청진동, 관철동, 창신동 등도 줄줄이 물에 잠겼다.특히 인사동 일대에서는 ‘다리목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집집마다 작은 목다리를 놓아 다니던 인사동에서 폭우로 목다리가 떠밀려가자, 주민들은 떠내려가지 않은 목다리를 차지하려 서로 경쟁했다. 누군가는 집 앞 대문에 다리를 걸어놓고, 전신주나 기둥에 묶어두며 필사적으로 고정했다.●1925년 7월 — 인사동을 휩쓴 또 한 번의 쓰나미5년 후인 1925년 7월, 또다시 쏟아진 장마에 인사동은 비극을 반복했다. 이미 몇 번의 집중호우로 물바다가 된 서울에 7월 11일 새벽부터 다시 폭우가 내렸다. 물은 북악산과 낙산 자락을 타고 재동과 계동을 덮쳤고, 그 아래 인사동과 낙원동 일대는 순식간에 붉은 물에 휩쓸렸다. 가장 피해가 컸던 곳 중 하나가 인사동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하수도였다. “하수도가 불완전한 까닭”에 비가 내리자 물은 도로를 역류해 길바닥으로 솟구쳤고, 길 양옆의 상점과 민가 수십 채가 침수되었다.종로서 관내에서는 인사동 일대의 집 65호가 마루 아래까지 침수되었고, 1호가 마루 위까지 침수되었고, 집 한 채는 완전히 무너졌다. 우체통 하나마저 쓰러졌고, 경복궁 돌담은 4간 길이로 무너졌다. “물은 길 위로 넘쳐서” 사람들은 길이 아닌 물 위를 걸어야 했으며, 관훈동 방향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비는 하루 종일 내렸고, 침수된 가옥은 전체 종로서 관내만 해도 150여 호에 달했다. 특히 인사동은 바닥이 낮은 지형이었기에 피해가 더욱 컸다.● 1926년 7월 — 바람과 비, 불까지 겹쳤던 날1926년에는 단순히 물난리만이 아니었다. 장마가 끝날 즈음, 폭우와 함께 거센 바람이 몰아치며 시내 곳곳의 낡은 공가(空家)가 무너졌고, 그중 인사동에서는 무너진 폐가에서 화재가 발생해 부녀자 두 명이 사망하는 참극까지 벌어졌다.인사동 일대의 하천은 또다시 범람했고, 광화문 통과 톄신국(체신국) 일대는 물론, 인사동·관훈동에도 길이 잠겨버렸다. 당시 총독부는 피해 조사에 나서고, 시찰 차량을 투입하며 “자동차 안에서 응급조치”를 지시했다고 하나, 주민들에겐 그저 허망한 구호였다.그럼에도 사람들은 견뎠고 누군가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왔다. 수해가 반복되자, 동아일보사는 1925년에는 자체 구호반을 조직했다. 인사동 주민을 위해서는 “중앙예배당”을 임시 수용소로 지정했고, 밥을 먹을 곳조차 없던 이들에게는 “식료품과 거처의 주선”을 약속했다. 당시 신문은 “집이 무너져 갈 곳이 없거나, 침수로 인해 침식을 할 수 없는 이는 본사로 통지하면 구호반이 출동해 현장에서 방편을 취하겠다”고 적고 있다.■ 인사동은 원래 물이 모이는 자리였었네요. 조선시대에는 관청과 사찰이 많았던 이곳이, 일제강점기에는 골목과 골목 사이 민가로 빼곡히 들어찼습니다. 집은 많은데 하수도와 배수시설이 턱없이 부족 했고, 바로 곁에 청계천이 흐르는 지형상 매번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엇습니다. 청계천이 수해의 원인이었던 셈입니다. 수해가 나면 인사동 사람들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자연과 싸웠습니다. 폭우가 내리면 문을 닫고 널빤지 등으로 물을 막았고, 양푼을 들어 물을 퍼냈습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텼습니다. 폭우가 지나가고 나면 주민들은 무너진 담장을 수습하고, 떠내려간 집기들을 건져내며 삶의 자리를 되찾으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신문사를 비롯해 뜻이 있는 단체들이 힘을 모아 수재민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1926년 이후 기사에서 인사동이 큰 수해를 입었다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공사 중이어서 오히려 수해의 원인이 되었던 하수관 공사가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서울이 수해라는 자연재해를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인사동을 다룬 3년의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추가적으로 앞에서 보여드렸던, 1925년 인사동 수해 당시 서울 시내의 다른 모습의 사진을 소개해 드립니다. 당시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동아일보 지면에 실렸던 사진입니다. 사진기자로서 당시의 사진이 제대로 인화지로 보관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무척 아쉽긴 하지만, PDF 파일의 형식이라도 당시 이미지가 살아남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참고기사1920년 8월 3일. 「京城의水害慘狀, 一個月間에三次大洪水」1925년 7월 12일. 「市內外水害罹災民」1925년 7월 13일 「市內水害狀况」1926년 7월 16일. 「再昨日의暴風驟雨 市內의浸水狀態」1926년 7월 18일. 「中部以北을中心으로 旱災後의暴風雨」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12
    • 좋아요
    • 코멘트
  • [고양이 눈]마음 밝혀주는 등불

    가게 앞 전등에 누군가 ‘웃는 얼굴’을 그려 놓았네요. 바라만 봐도 절로 미소짓게 됩니다. 웃음은 마음속 어둠을 밝혀 주는 작은 등불입니다. ―경기 수원시 매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0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궁궐에서 동물원으로, 다시 궁궐로… 창경궁의 장면들 [청계천 옆 사진관]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창경원에 들어온 코끼리 사진입니다. 철창 안에 서 있는 두 마리의 코끼리 부부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창경궁으로 복원되었지만 이곳은 한 때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개조되어 서울의 대표적인 유락 시설이었습니다. 글의 끝부분에서 사진 몇 장도 함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일제에 의해 조선의 궁이 동물원으로 변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지은 궁이었는데 성종 대에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확장했습니다. 창경궁이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면서입니다. 창경궁의 전각들이 대거 철거되고 그 자리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들이 건립되기 시작합니다. 이름도 궁에서 원으로 바뀐 것이지요. 1910년대부터 창경원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서울의 명소였습니다. 1917년 4월 22일에는 하루에만 무려 1만 2966명이 입장을 해 당시 서울 인구 25만 여명 대비 5%가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1924년부터는 “봄 벚꽃이 만개할 때를 기다려 이, 삼 주일 동안 시기를 정하여 동물원을 밤에도 열고 수천 개의 전등을 장식하여 흥취를 돕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창경원의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은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되며 경성의 대표적인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매년 4월 20일을 전후하여 열흘 정도 오후 10시 반까지 특별 개원했는데, 이때는 수백 개의 전등을 나무에 매달고 17m에 달하는 네온탑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우선 백년 전 사진의 주인공인, “창경원에 들어온 코끼리”의 사연을 읽어보겠습니다. 상군부처(象君夫妻 入園)창경원 동물원에는 지난 2일 오후에 새 식구 둘이 늘었다. 이는 그 안에서 몸집도 크 중 크거니와 날마다 구름 같이 모여드는 많은 손님들의 큰 인기를 끌던 홀애비 코끼리가 작년 이 맘때에 세상을 떠난 뒤로 그 방주인이 없더니 이번에 싱가포르로부터 코끼리 부부가 일본 神戶(고베)에 와서 유죽(有竹)이라는 일본 사람 동물 장사의 중매로 바다를 건너 인천에 와서 차를 타고 와서 그 방 주인이 되었는데 그들의 나이는 일곱 살과 여섯 살이며 몸값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이 두 식구가 는 대신에 그 웃방에 있는 하마(河馬)한 부니 그 대신 동물 장사 손으로 가게 되었다하며 부부의 금슬이 끔직이 좋은 모양인데 이번에는 그 부부가 가끔 운동을 할 만한 운동장을 훌륭하게 만드는 중이라더라.1925년 7월 4일자 동아일보■ 코끼리 부부가 동물원에 도착한 대신 하마 한 마리가 일본 상인을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코끼리 말고 다른 동물들은 궁궐이었던 창경원에 어떻게 들어오고 나갔을까요? 서울에 있던 동물원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궁금해서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 새 사자와 ‘사자원숭이’… 동물원은 시험 중1924년 7월, 창경원 동물원에는 서인도 출신 ‘사자원숭이’(獅子猿) 한 쌍과 함께 젊은 사자 두 마리도 새로 들어왔다. 사자원숭이는 얼굴과 꼬리에 사자와 닮은 털이 나 있어 이름 붙여진 동물로, 한 쌍에 150원가량이라 전해졌지만, 아직 시험 양육 중이었다. 새 사자들은 일본 유전(有田) 동물원에서 이송된 두 살 된 개체로, 만약 적응에 성공하면 기존의 늙은 사자 두 마리에 1,500원을 더 얹어 교체할 계획이었다. 기존 사자 가족은 아버지가 죽고 어미(14세)와 딸(8세)만 남은 상황이었다.● 창경원은 봄 소풍 1번지, 동물들도 봄앓이1933년 4월, 창경원은 서울 시민의 봄맞이 행락지로 인기를 끌었다. 진달래, 개나리와 함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 하루에 1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창경원을 찾았다. 코끼리, 호랑이, 곰, 사자 등 동물들 또한 ‘봄의 안타까움’을 참지 못해 하염없이 울타리 너머를 내다보며 몸을 비볐다. 원앙과 두루미는 물 위에서 춤을 추었고, 잔디밭에는 푸른 새싹이 솟았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봄을 즐긴 그 풍경은 창경원의 대표적 장면이었다.● 호랑이의 비극, 창경원 첫 사고그러나 창경원 동물원이 항상 평화로운 곳은 아니었다. 1933년 3월 30일, 창경원 호랑이가 우리에 너무 가까이 접근한 6세 아이를 할퀴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는 평안남도에서 상경한 가족의 아들 김태하로, 어머니와 함께 호랑이를 구경하다가 다가선 순간 변을 당했다. 어머니 역시 아이를 구하려다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창경원 개원 이래 최초의 중대한 참변이었다.● 겨울 코끼리, 서민보다 따뜻한 방에1957년 겨울, 창경원의 코끼리는 유리문으로 둘러싸인 스팀 난방실 안에서 월동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겨울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코끼리는 따뜻한 방에서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어딘지 쓸쓸하고 추워 보였다고 당시 신문은 전했다. 한편, 같은 시기 북극곰은 오히려 생기를 발산하며 활발하게 우리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군 장군이 기증한 곰, 창경원으로1955년 4월, 미극동지상군 총사령관 테일러 장군은 자신이 기르던 3살 된 수컷 곰 한 마리를 창경원에 기증했다. 간단한 기증식에는 미군과 서울시장이 참석했고, 8군 군악대와 의장병이 동원되며 의식은 장식되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창경원의 재건에 보탬이 되고자 한 기증이었다.■창경원은 단순한 동물원이 아니었습니다. 궁궐의 과거와 일제의 통치 전략, 그리고 도시민의 일상과 욕망이 얽힌 복합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울던 코끼리, 춤추던 홍학, 관람객을 할퀸 호랑이, 겨울을 버티던 동물들의 이야기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창경원은 해방 이후에도 한참 동안 서울의 인기 유원지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1981년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고 철거와 이관 작업을 하면서 1986년 8월 23일 다시 창경궁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동아일보 DB 속에 있는 창경원의 옛날 모습 사진 몇 장을 소개하며 오늘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기사 (동아일보)〈상군부처 入園〉/1925년 7월 4일〈昌慶苑에 새손님〉/1924년 7월 8일〈郊外에賞春客沙汰 昌慶苑에만萬名〉/1933년 4월 17일〈동물원 암 호랑이가 六歲 兒를 할켜 重傷〉/1933년 4월 1일 (석간)〈테將軍의 ‘곰’ 昌慶苑서 寄贈式〉/ 1955년 4월 19일〈겨울철 서민층보다 나은 ‘코끼리’〉/ 1957년 12월 3일〈일제가 창경원으로 바꾼 창경궁〉/ 2024년 9월 12일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05
    • 좋아요
    • 코멘트
  • [고양이 눈]꽃자리를 찾아서

    구상의 시 ‘꽃자리’에는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저기서 모인 아령들이 단돈 1000원에 팔리고 있네요. 하지만 곧 주인을 찾아 자신만의 꽃자리를 펼치겠죠. ―서울 동묘시장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7-0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고양이 눈]마법으로의 초대

    손끝에 놓인 투명 구슬에 아이들이 정신을 뺏겼습니다. 구슬에 담긴 것은 자신들의 모습이지만, 아이들은 구슬을 통해 다른 세상을 봅니다. ―서울 송파구 성내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3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고양이 눈]다시 몸단장

    장마가 주춤했던 지난 주말, 여기저기 나들이를 했더니 몸이 좀 더러워졌네요.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며 상쾌한 발걸음을 위해 준비 중입니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음악을 기다리던 시절, 조선 첫 라디오 방송 현장 공개 [청계천 옆 사진관]

    라디오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작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1925년 6월, 조선에서도 마침내 전파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오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 풍경은 특별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그 첫 순간을 담은 사진 한 장을 소개합니다. ● 1925년 6월, 음악이 전파를 타다동아일보 1925년 6월 26일자 6면에는 ‘무선전화 정기 시험방송’ 기사와 함께 아주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이 실렸습니다. 체신국 시험방송실에서 음악을 방송하는 장면입니다. 헤드폰을 쓴 방송국 직원 앞에 기타를 든 서너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방송실 안에서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마이크와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나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연주하는 이들은 조선 땅에서 최초로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송출한 사람입니다.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무선전화매주 네 차례 정기 방송음악과 일기예보, 뉴스 등을 방송〉O체신국에서 시험적으로조선에도 ‘라디오’ 열풍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최근에는 사설 무선전화 설치를 당국에 신청하는 이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경성 시내에서만 허가를 받은 사람이 70여 명에 이르고, 허가 없이 무단으로 설치한 곳도 수백여 곳에 달한다. 이에 따라 체신국에서는 일반 무선전화 청취기 설치자들의 편의를 위해, 종전에는 일주일에 두 차례 낮 시간에 시험 방송을 하던 것을 변경하여, 매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일요일의 네 차례씩 저녁 7시 30분부터 9시까지 한 시간 반 동안 방송을 하기로 하였다.체신국 내 방송실에서 기사, 일기예보, 음악 등 다양한 흥미로운 내용을 교대로 방송하며, 21일부터 일반 청취자들도 들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O청취 출원자부산, 원산, 인천, 수원 등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청취 장비 설치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에 체신국에서는 현재 방송실에서 사용하는 집음 장치(소리를 모으는 장치)가 매우 불완전하고, 방송용 기계도 부족하여 이대로는 무선전화 애호가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따라서 당국은 방송 장비를 다시 설치할 방침으로 여러 방안을 고려 중이다. 얼마 전에는 도쿄에서 돌아온 포원(浦原) 체신국장이 시찰한 도쿄 방송국의 집음 장치와, 근등(近藤) 사무관이 시찰한 관동청 체신국 내 시험 방송실의 장비 등을 참고하여, 현재 체신국 방송실의 장비와 설비를 개선하려 하고 있다.또한 경성 시내는 물론, 원격지 청취 신청자들의 요구에도 응답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방송 설비를 갖출 계획이다. 예산만 확보된다면, 방송실을 현재 체신국 근처에 새로 짓겠다는 의향으로 모든 사항을 조사 중이다.민간 측에서도 방송국 설치를 희망하는 자가 10여 단체나 되는 상황이어서, 당국에서는 이들이 하나로 연합해 재단법인을 설립한 뒤 허가를 내줄 방침이다.특히 청취 신청자 중에는 일본에서 방송하는 것까지 듣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어서, 경성 방송국이 설립되기 전까지는 실험적 의미로 일본 방송국의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다만 일본 방송국의 승인이 있는 경우에만 허가할 예정이며, 현재 일본 방송국과 협의 중이다.O무허가 장치허가 없이 장비를 설치한 사람에 대해서는 무선법 제16조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단속 인원을 각 반에 나누어 시내 전체를 순찰하며 무허가 장치 소지자들을 적발할 예정이다.하지만 신청 절차는 복잡하지 않다. 체신감리과에서는 ‘사설 무선전화 시설원(私設無線電話施設願)’이라는 신청 용지와 기타 절차에 필요한 내용을 인쇄하여 희망자들에게 배포하고 있다.O가정용 청취장비 설치 방법과 기계 설비 등은 다양하다. 무선전화 청취기를 상점에서 완제품으로 구입하려 해도 종류가 여러 가지라 일정한 가격은 없다. 직접 만들 수 있는 부분은 만들고, 못 만드는 것만 사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하면, 가정용 청취기는 불과 5~6원 정도에 설치할 수 있다.기계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어 모든 것을 사서 남에게 의뢰할 경우, 가까운 거리의 방송을 혼자서 들을 수 있는 장비라도 15~16원에서 20원 정도는 들 것으로 보인다.최근 체신국에서 산촌정일(山村靜一) 씨를 통해 조립한 청취기 같은 경우는 귀에 대고 듣는 수화기 외에는 실비가 90전밖에 들지 않는다.설비에 있어서는 수신용 공중선(안테나)을 높이 달수록 좋지만, 특히 가정에서는 그리 높게 할 필요 없이 지붕 위에서 전선 하나를 늘여서 설치해도 무방하다. 실내에 설치하는 청취기는 각 부품을 잘 맞추어 조립해두면, 기계에 특별한 고장이 없는 한O영구적 비용 절감별도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앞으로 조선에서도 외국처럼 민간 방송국이 설치되면, 청취기 설치자에게 약간의 청취료만 받고 들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한다. (계속)● 음악을 기다리던 마음, 60년 뒤의 어느 여름사진으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1980년대, 필자가 중고등학생이던 시절에도 음악은 여전히 기다려야만 들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 무대를 본 다음 날, 친구들은 집에서 라디오로 녹음한 테이프를 자랑하듯 들고 다녔습니다. 마이마이나 워크맨에 테이프를 넣고, 이어폰을 나눠 끼운 채 조심스레 노래를 들려주던 그 시절. 라디오에서 신청곡이 흘러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던 밤도 많았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하고, 곡이 끝나면 재빠르게 정지 버튼을 눌렀습니다. 테이프에는 매직펜으로 “1986년 6월 신곡”이라고 제목을 써넣었습니다. 동네에는 직접 엽서를 써서 방송국에 신청곡을 보낸 누나들도 있었습니다. 사연이 채택될지 모르는 긴장과 기대 속에서, 우리는 음악을 통해 세상과 연결된다고 느꼈습니다.부모님은 라디오에 빠진 자녀를 걱정했지만, 그건 우리가 시대와 소통하던 방식이었습니다.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가 오늘날 유튜브나 쇼츠에 몰두한 자녀들을 바라보며 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면, 그건 그 시절 우리 부모님과 같은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언젠가는 잘 성장하지 않을까요?● 라디오, 음악을 전해 준 설렘부터 문화체험의 통로까지 1920년대 조선은 라디오라는 신문물을 처음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1924년 체신국은 부산과 대구에 수신기를 설치하고, 용산 무선국에서 송신하는 신호를 수신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이후 1926년, 조선호텔에서는 무선방송국 설립을 위한 발기인 회의와 총회가 열렸고, 민간의 참여가 본격화되었습니다. 1929년 쯤 라디오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교육과 정보, 문화의 매체로 조선 사회에 자리 잡아가고 있었음을 당시 라디오 방송 편성표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29년 9월 9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편성표입니다. 라디오 방송 (1929년 9월 9일, 월요일)오전10:00 기상 개황, 전국 각지의 날씨 실황10:30 요리 정보, 일용품·시사 정보11:00 [가정 강좌] 어린이의 구강 위생 (1) — 박준대 강사정오12:00 시보(정오 알림), 뉴스오후2:20 음악, [라디오 학교]2:10 [여성 강좌]3:45 뉴스6:30 음악 동화7:10 강연 — 「조선 동요 작곡에 대하여」 이종태7:50 뉴스8:00 연주회가. 서곡 — 빠른 장조나. 메누에트다. 회전조(선율)연주: 제1 바이올린 — 홍란파 / 제2 바이올린 — 홍재유곡명: 장조 이중주곡 (보케리니 작곡)밤9:35 라디오 체조9:50 내일 방송 순서 발표, 기상 개황, 전국 각지의 날씨 실황, 뉴스 (재방송), 시보10:20 남도 단가 독창 — 김정문, 북 연주 — 정순명이제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0년 전, 조선의 누군가는 라디오의 방향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전파를 타고 흐르는 음악을 처음 들었을지도 모릅니다.이번 주 백년사진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전파를 타고 음악이 흘러나온 날의 풍경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사진 속에서 무엇을 보셨나요? 여러분의 기억과 상상을 댓글로 나눠주세요.참고 기사 (동아일보)1924년 7월 6일자 : 무전방송 시험1925년 6월 26일자 : 무선전화 정기 방송1926년 2월 13일자 : 무전방송 총회1926년 2월 17일자 : 방송국 발회1927년 1월 21일자 : 라디오 대회1929년 9월 9일자 : 라디오 편성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28
    • 좋아요
    • 코멘트
  • [고양이 눈]함께한다는 것

    어린이집에서 산책 나온 아이들이 노란 띠를 꼭 쥐고 걸어갑니다. 친구들과 발걸음을 맞춰야 하지만 함께라서 안전합니다. ―경기 광명시 광명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고양이 눈]짝을 찾기 위한 기다림

    신발 도매상가의 한 가게에 모양과 높이가 다양한 굽이 빼곡히 쌓여 있네요. 이 굽들은 어떤 구두와 짝을 이루게 될까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궁궐 철거에 놀란 가슴…독립문도 없어진다는 소문까지[청계천 옆 사진관]

    1. 무너지는 궁궐, 남겨지는 한일제 시대 문화재의 개념이 지금 같지는 않았더라도 뭔가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축물들이 철거되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갑니다. 그래도 생생한 증언을 듣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기와 관심에서 멀어진 궁궐이 헐려가는 것을 본 기자가 당시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게 있어 오늘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지금은 사라진 궁궐 사진입니다. 1925년 6월 21일자 동아일보에 궁궐 사진 한 장이 실렸습니다. 제목은 “헐려가는 경모궁(景慕宮)”입니다. 창경궁 건너편, 조선총독부 의원 근처의 동팔호실 뒤편(지금의 서울대병원) 에서 철거가 한창이던 경모궁의 모습이었습니다. 경복궁 덕수궁 운현궁 등은 알지만 ‘경모궁’이란 이름은 여러분도 생소하실 겁니다.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경모궁(景慕宮)이 헐려 간다!창경원(昌慶苑) 건너편 총독부의원 동팔호실(東八號室. 편집자 주: 일본이 세운 정신병원) 이웃에서 안타까운 정신병자들의 아우성을 귀가 아프게 들어가던 경모궁 옛집은 무심한 모군(募軍. 편집자 주: 공사판 따위에서 삯을 받고 품을 파는 사람)들의 곡괭이 끝에 무참하게도 헐어 간다. 장엄한 궁성을 등지고 아담한 낙산(洛山)을 향하여 외롭게 서 있던 이 집은, 리조(李朝)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절륜한 힘과 위대한 포부를 가지고 큰뜻을 펴려고 하다가 낙형을 당하여 지하의 혼이 된 천추의 원한을 위하여, 그의 아들인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지어놓고 춘추로 제향하던 곳이다.세월이 흐르자 시국조차 바뀌어, 춘추 두 번의 향촉은 이미 끊어진 지가 오래였거니와, 이제 말없이 헐려 가는 옛집을 위하여 울어주는 자는 창덕궁(昌德宮) 비원으로 돌아드는 ‘두루미’ 떼라 하는지?경모궁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고자 정조가 지어 올린 제향 공간이었군요. 그 집은 궁궐의 화려함보다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는 조용한 공간이었고, 정조의 효심이 깃든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제향도 끊기자 행정 당국은 이 공간을 없애기로 결정합니다. ‘정신병자들의 아우성이 귀가 아플 정도로 들려오던’ 근처의 총독부 의원 건물 옆에서, ‘무심한 인부들의 곡괭이 끝에’ 경모궁은 무참히 무너져갔습니다.2. 철거 소문이 낳은 또 다른 불안, 독립문경모궁이 헐리자, 사람들의 입에서는 또 다른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독립문도 곧 철거된단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에 또 한 번 놀라는 격인가요. 하지만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동아일보는 1925년 9월 16일 석간 기사 “인왕산은 의구한데 용자에 참흔 처처”를 통해 이 소문에 대해 보도를 합니다. 일종의 팩트 체크인 셈입니다. 그리곤 “독립문은 아직 헐리지 않았습니다. 철거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는 결론을 냅니다. 하지만, 기사 곳곳에는 사람들의 걱정과 슬픔이 진하게 묻어 있습니다. 해태상의 이전과 장충단을 공원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궁궐까지 철거하는 것에 대한 ‘흰 옷 입은 사람들의’ 분노도 느껴집니다.생로병사(生老病死)가 일반 동물의 타고난 팔자요, 전변환멸(轉變換滅)이 또한 세상 만물의 피치 못할 운명이라서,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생겨난다고 우리가 따라 다니면서 슬퍼하고 기뻐할 까닭이야 무엇이겠습니까마는 여러 백년 궁(宮) 앞을 지키던 “해태”가 덜미를 잡히어 쫓기어 간지가 이미 오래였고 수십 년래 애국충신의 장엄한 혼백(魂魄)을 모시던 장충단(奬忠壇)이 색다른 발굽에 밟힌 지 또한 오래였으며 무심한 로동자의 곡갱이에서 서대문(西大門)과 경모궁(景慕宮)이 헐린 뒤를 이어 독립문마저 허물어 버린다는 소식은 흰 옷 입은 사람의 가슴에 얼마나 쓰라리게 울리었겠습니까.독립문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습니다. 을미년의 치욕 이후, 독립을 기념하고자 서재필과 여러 지사들이 건양 원년에 뜻을 모아 세운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독립문도 시간이 흐르며 쇠락해갔습니다.“처음에는 태극기를 달았으나, 삼일운동 뒤 경찰이 제거하고 소방대가 물을 뿌려 문 자체가 손상되었다.” “독립문 오른편 다리는 갈라졌고, 눈에 띄게 금이 간 곳도 있었다.”그 상징성은 살아 있으나, 실상은 철조망에 둘러싸인 쇠락한 석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국은 독립문 철거는 사실무근이라 밝혔습니다. 하지만 경모궁처럼 느닷없이 철거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번져 있었습니다. 경모궁의 철거는 단지 한 건축물의 소멸이 아니라, 역사를 지워가는 손길의 서막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독립문은 지금도 서울 서대문구에 서 있습니다. 3. 시인 이은상이 회상하는 경모궁의 역사사라진 궁궐 경모궁에 대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추억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 뒤로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인으로 유명한 이은상 선생은 1929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월광하에서서 - 사친애”라는 글을 통해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시 꺼내 듭니다. 이은상은 단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조의 삶, 그리고 정조가 왜 경모궁을 지었는지를 통찰합니다. 이 글에서 그는 “달아, 달아 밝은 달아…”라는 동요가 정조가 지었다는 설을 인용하며, 그 배경에는 피눈물 나는 조선의 비극이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세자의 누이 화완옹주와 그 남편 정치달, 그리고 영조의 후궁 문씨는 사도세자를 중상했고, 마침내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생을 마쳤다.”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단지 ‘궁중의 권력 다툼’이나 ‘정신 질환자’의 문제가 아닌, 역사 전체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슬픔으로 보았습니다.나는 오래전부터 이 역사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 비극은 사람의 피눈물 없이는 읽어내릴 수 없다. 이 얼마나 참담한 역사인가.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같은 사람은 이 상황에서 최소한의 상소라도 올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 팔짱만 낀 채 방관했다.그리하여 세자는 이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의 아들인 어린 정조는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뼛속 깊이 사무치게 되었다.후일, 영조 역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긴 했지만, 한 번 떠난 생명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눈물만이 쓸쓸히 무릎 위로 떨어질 뿐이었다. 그는 정조를 안고 후원에 거닐며, 세자의 넋을 향해 은근히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이리하여 1777년(정조 원년), 정조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임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풀 길이 없었다.그 뒤에 경모궁을 지은 것도, 정조가 아버지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며, 월근문(月覲門)을 세운 것도 또한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양주에 있던 아버지의 능을 수원으로 옮긴 것도, 모두 아버지를 향한 그의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경모궁은 정조의 애끓는 효심이자, 조선의 슬픈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마지막 기념비였던 것입니다. 경모궁의 철거를 아쉬워하며 쓴 기사에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이제 말없이 헐려가는 옛집을 위하여 울어주는 자는 창덕궁 비원으로 돌아드는 두루미 떼라 하는지?정말 두루미가 떼를 지어 서울 하늘을 날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본 두루미 떼의 월동지 중에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경기도 연천과 김포였습니다. 100년 전에는 도심까지 들어왔으려나요? 그것보다는 하얗고 고고한 두루미의 울음소리를 통해 기자는 역사의 아픔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기사처럼 실제 종로 일대에서 두루미를 볼 수 있었다면 동화 속 풍경 같았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멋진 광경입니다. 오늘 소개한 사진은 힘없던 시절, 역사적 공간이 허물어져도 막을 수 없었던 우리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올 해 4월, 서울의대 교수를 인터뷰하러 갔을 때 경모궁의 흔적인 ‘함춘문’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건물의 일부가 살아남아, 사라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오늘 우리에게 말없이 전하고 있었습니다. 경모궁 전체가 남아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참고기사동아일보 1925년 6월 21일자 〈헐려가는 景慕宮〉동아일보 1925년 9월 16일자 석간 〈仁旺山은 依舊한데 勇姿에 慘痕處處〉동아일보 1929년 9월 25일자 〈月光下에 서서 - 思親哀〉 (이은상)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21
    • 좋아요
    • 코멘트
  • [고양이 눈]인간과 자연의 시너지

    기와 위로 노란 꽃무리가 눈길을 끕니다. 단청의 연꽃 문양과 어우러져 어두운 기와를 환히 밝혀주네요.―서울 종로구 사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고양이 눈]과로는 금물

    봄내 잔디와 여린 꽃에 물을 주느라 바빴는지 물조리개가 눈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과로를 방치하면 위험해요.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총독부에 폭탄 던진 김익상 뒤엔 ‘이 청년’이 있었다[청계천 옆 사진관]

    1925년 6월 9일자 동아일보에 한 남자의 얼굴 사진이 실렸습니다. 생활고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당시 흔했을 사례일텐데 왜 고인의 얼굴 사진이 신문에 실렸던 것일까요? 기사를 읽어봅니다. 이 사진에는 조국 독립을 위해 삶을 내던진 한 남자와, 그로 인해 생을 견디다 못해 무너진 또 한 남자의 인생이 담겨 있었습니다. 의열단의 멤버였던 형 김익상의 이름과 인생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았지만, 그 뒤편에서 형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야 했던 동생은 너무나 조용히, 비극적으로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신문 귀퉁이에 남아 있는 동생의 이야기입니다.아래는 해당 사진과 함께 보도된 동생 김준상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기사, 몇 년 전 그의 형 김익상에 대한 보도 몇 꼭지, 그리고 김준상의 죽음 후 남아 있는 가족들의 삶을 다룬 기사 등을 종합하여 두 형제의 삶을 읽기 쉽도록 정리한 이야기입니다. ● 어느 불운한 시대의 그림자바람 한 점 없던 1925년 유월 초엿새, 경기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 288번지 허름한 초가 집에서 스물아홉 김준상이 삶의 끈을 스르로 내려놓았다. 오후 다섯 시,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몸은 외양간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문간을 들어서던 아내 이씨의 비명은 그 조용한 죽음을 흔들어 깨우기엔 너무 늦었다. 스무 살 너무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게 된 그녀는 그저 망연히 남편의 주검을 바라볼 뿐이었다.준상은 본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점점 기울자 7년 전 형 익상과 함께 고향을 떠나 용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 형제는 거친 막노동으로 하루를 버티었고, 비록 고되었으되 서로의 등을 기대며 견뎌냈다. 허나 그 짧은 평화도 잠시, 형 익상이 홀연히 상해로 떠나 의열단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면서 준상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형이 떠난 후, 준상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용산 제탄소에서 마차를 몰아 얻은 푼돈으로 노모와 형수, 어린 조카, 그리고 젊은 아내까지 다섯 식구의 입에 풀칠해야 했다. 새벽 이슬을 맞으며 나가 밤늦게야 돌아오는 고된 나날이었으나, 그 힘겨움보다 더 그를 짓누른 것은 마음속 깊이 스며든 절망이었다. “간곤(艱困)하여 살 수 없으니 내가 죽겠다.” 그는 몇 번이고 그리 중얼거렸다 한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말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지난 6일 집안 가족들이 동막리로 나간 동안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형의 그림자, 동생의 굴레준상의 형 김익상은 이 땅의 민초라면 누구나 알 법한 이름이었다. 평양 숭실학교 출신으로, 가난 속에서 자랐으나 나라 잃은 설움에 불타 광성연초공사를 박차고 일어나 1920년 중국 펑톈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요인 암살에 나설 것을 결단했으니, 그 뜨거운 피는 조선총독부 안으로 던져진 폭탄 한 발로 만천하에 알려졌다. 1921년 9월 12일, 총독부 회계과를 산산조각 낸 그 폭탄은 비록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지는 못했으나, 일제에 맞선 조선 민중의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염원을 똑똑히 보여주었다.7개월이 지난 1922년 3월 28일,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려다 실패한 청년이 체포되었다. 조사 결과 그는 그는 바로 총독부 폭탄 투척의 범인, 김익상이었다. 도쿄로 이송돼 재판을 받은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 다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혹독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1922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이는 상하이에서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바로 그 청년”이라 대서특필하며, 한 조선 청년이 일제의 핵심 권력에 두 차례나 타격을 가하려 한 사실을 온 조선에 알렸다. 김익상의 이름은 그렇게 민족적 영웅담으로 기록되었으니, 그의 용기는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를 지폈다.허나 그 영웅담의 뒤편에는 준상과 그의 가족들이 감내해야 할 엄혹한 현실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형의 행적이 경찰의 추적 대상이 되면서, 준상의 집은 늘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익상이 총독부 폭탄 투척 직전 경성으로 잠입했을 때도 그는 동생 준상의 집을 은신처로 삼았다. 준상은 묵묵히 형의 뜻을 헤아려 그를 숨겨주었으니, 그 시간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러웠을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독립운동가의 동생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명예나 보호 대신, 끊임없는 감시와 신문, 그리고 견디기 힘든 경제적 곤궁만을 안겨주었다.● 조용히 스러져간 한 시대의 증인준상의 죽음은 단지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현실이 만든 비극이자, 이름 없는 이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불쌍한 죽음을 애도하며 돈을 모아 상여를 사고 장례를 치렀다. 초라한 장례식이었으되, 그들의 정성은 준상의 마지막 길을 조금이나마 덜 외롭게 해주었다. 남은 유족은 노모와 형수, 아내, 그리고 어린 조카 하나뿐이었다.김익상의 투쟁이 조선 독립의 불꽃이었다면, 김준상의 죽음은 그 불꽃 뒤에 드리운 희생의 그늘이었다. 그는 싸우지 않았지만, 형의 싸움을 지켜보다 스러져갔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그의 죽음에 대한 짧은 기사는 어쩌면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과 죽음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리라. 식민지 조선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무너져간 그의 삶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한 시대의 증인이었다. 준상의 죽음을 당시 동아일보는 ‘불운아’로 이름 붙였다.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담지만, 그 속엔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사연들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오늘 마주한 백 년 전 한 장의 사진 속 청년은 단순히 불운했던 가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살아내려 애썼지만 끝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존재였습니다. 사진 속 청년의 사연을 추적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후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그리고 그들을 저를 포함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도와야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장을 잃고 남은 가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걱정도 됩니다. 꽤 지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 드리자면, 1990년대 말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 학교 친구가 당시 국가 정보기관에 특채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가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방식의 보답이 우리 사회의 책임있는 행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책임을 지금도 계속 해오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한 젊은 가장의 얼굴 사진에서 역사의 이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의견을 들려주세요. 참고기사:1922년 4월 5일: 김익상 자백은 사실1922년 5월 7일: 장기에 착한 김익상1922년 5월 20일: 총독부 폭탄범은 상해의 폭탄범 김익상1922년 5월 21일: 다섯 가지 죄목으로 공판에 부쳐1925년 6월 9일: 불운아! 김익상의 동생 자살1926년 2월 17일: 떡국을 끓여놓고…2009년 11월 14일: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경 <29> 김익상 의거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14
    • 좋아요
    • 코멘트
  • [고양이 눈]덤벼라 태양아!

    햇볕이 부쩍 따가워진 요즘, 파인애플을 닮은 다식물 ‘괴마옥’은 벌써 선글라스까지 장착했네요. 여름나기 준비 완료!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조선 최초 모스크바에 파견된 기자 이야기[청계천 옆 사진관]

    ● 모스크바 시가행진 주변을 걷는 조선의 젊은 기자1925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외국인들의 얼굴 사진이 실렸습니다. 사진 설명을 보니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설명은 단순한 사진 캡션이 아니었습니다. 192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메이데이 행사를 직접 취재를 했고 그리고 그 현장을 촬영한 이가 조선에서 파견된 기자라는 사실이 저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 언론이 러시아에 기자를 보낼 만한 여력이 있었을까요? 또 그 기자는 누구였을까요?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관련 기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유럽에서 철학으로 박사를 받은 후 귀국해 동아일보에 입사했던 이관용 기자였습니다. 그리고 5월 행사 취재를 위해 2달 남짓 앞선 2월 말에 모스크바로 출발했던 기록이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도 4월 초순 경이었습니다. 요즘에야 하루 이틀이면 전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100년 전에는 그야말로 장기간 출장을 떠나야 국제 이벤트를 취재할 수 있었던 시대였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출장 출발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 그의 나이 31살 때입니다.아래는 1925년 2월부터 6월까지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관용 기자 관련 기사를 압축 정리한 내용입니다. ● ‘붉은 나라의 진실을 전하라’ — 동아일보, 1925년 모스크바 특파원 파견기1925년 2월, 동아일보는 철학박사 이관용을 소련(당시 적로국)에 특파원으로 파견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을 거쳐 사회주의 국가로 재편된 소련은 ‘세계의 비밀 나라’로 불릴 만큼 폐쇄적인 곳이었다. 이미 동포들이 러시아로 들어가 생활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현지 동포들의 생사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던 이때, 동아일보는 독자들에게 그 실상을 전하고자 결단을 내린다.이관용은 유럽 유학을 통해 국제 정세에 밝았으며, 특히 러시아 문제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동아일보는 그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한 소련의 실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했다.그가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첫 보도한 내용은 5월 1일 메이데이(May Day) 행사였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만국의 무산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적십자 거리에서는 노동인민위원장이 열병을 지휘했고, 수십 대의 비행기가 하늘을 수놓았다. 이관용은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펼쳐진 ‘붉은 도시’의 정치 선전 장면을 생생히 기록했다.하지만 이관용의 눈은 겉으로 드러난 체제의 위용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소련 사회 곳곳의 불안정함을 목격했다. 시내에 만연해 하루에만 3차례 직접 목격한 소매치기, 시민들에 대한 과도한 검문검색, 공무소 출입에 필요한 복잡한 허가 절차, 반혁명 세력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은 당시 소련의 내부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여행자는 군경에게 언제든 신분을 제시해야 했고, 공산당 기관 방문에는 특별 허가증이 필요했다.그는 또한 신경제정책 하에서 상인 계층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도 지적했다. 노동을 하지 않고 개인 영리 사업에 종사하는 자, 즉 ‘넵만(Nepman)’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서너배 높은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과도한 물가 상승에 시달렸고, 노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는 심각했다. 노동복을 입지 않고 부르조아 신사복을 입고 다니면 ‘넵만’이라고 업신여겨지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 특히 외교관과 기자 이외는 사치스러운 의복을 모스크바에서는 볼 수가 없다고 전했다. 구걸하는 이들에 대한 공산당원들의 냉담한 반응은, 혁명의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이관용의 보도는 일상에도 닿아 있다. 그는 러시아의 국(羹) 문화가 조선의 국밥이나 찌개와 비슷하다고 소개하며, 서유럽인이 기피하는 생선 요리 ‘쏠랸카’가 조선의 생선지짐이와 유사하다고 적었다. 식당에서는 여전히 종업원이 외투를 받아주며 팁을 기대하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새로운 체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구체적인 생활 풍경은 그의 관찰력의 깊이를 드러낸다.이관용은 5월 16일 모스크바를 떠나는데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독일로 출장을 이어간다. 러시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출국 허가뿐 아니라 통과 국가인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의 영사관 승인과 주러 일본영사관 승인까지 총 6개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금전 소지 한도는 300엔 이하로 제한되었고, 여덟 차례에 걸친 휴대품 검사가 이어졌다.독일에서 기자는 “모스크바에서 보지 못한 중절모, 모피코트, 유행복을 입은 여성들을 보고 부르주아 세계에 온 듯했다”며, “사람들이 마치 기계처럼 살아가고, 소부르주아적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또 기자는 독일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을 방문, 도시 곳곳에 배어 있는 학문적 분위기를 “붉게 핀 칠엽수 아래로 정장을 한 시민들이 걷고,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자연스레 칸트의 사색이 떠올랐다. 이 도시는 분명 철학이 자라날 만한 토양이다”라고 표현했다. 4개월에 걸친 소련과 독일 출장을 마친 기자의 경험담을 나누기 위해 동아일보는 1925년 6월 17일자 사고(社告)를 통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 ‘적로·독일 시찰 강연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한다. 평양 사리원 신의주 개성 대구 전주 광주 부산 원산 함흥 청진 철원 인천 등이 대상이었다. 이 강연은 마침 독일에서 힌덴부르크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과 맞물려, 사회주의 소련과 군국주의 독일이라는 유럽 양대 체제의 변화를 독자에게 입체적으로 소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자주적인 시선으로 세계 변화를 보려 했던 도전100년 전, 한국의 신문사가 소련으로 기자를 특파한 것은 단순한 외신 보도 목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의 언론이 자주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려 했던, 전례 없는 도전이자 실천이었습니다.철저한 감시 사회 속 불안과 모순, 혁명 후유증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던 사람들의 열정과 문화를 담아낸 이관용의 보도는 조선 언론이 세계 정세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구글로 추가 검색을 해 보니 1894년생인 이관용 기자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1920년 스위스에서 조선인 최초로 유럽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23년 귀국한 후 기자가 되었습니다. 1929년 신간회 활동 중 체포돼어 2년 남짓 옥고를 치른 후 1932년 출옥했다가 1933년 바다에서 해수욕을 하다 횡사했습니다. 그의 굵고 짧은 인생이 아쉽습니다. 아래 사진은 AI로 강화시켜 본 이관용 기자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신문이라면 아마 현지 취재 중인 기자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을 겁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모스크바를 걷던 젊은 기자의 얼굴을, 그리고 그가 남긴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07
    • 좋아요
    • 코멘트
  • 6·25 참전 용사 시구… 현역 조종사가 시타

    현충일인 6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두산 경기에서 6·25 참전 공군 조종사인 김두만 장군(오른쪽)이 시구하고 있다. 시타는 김 장군의 전우였던 고 강호륜 장군의 손자인 현직 F-15K 조종사 강병준 소령.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하늘의 영웅, 전우 조종사의 손자와 프로야구 시구 시타[청계천 옆 사진관]

    현충일인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 2025 KBO 리그 두산베어스 대 롯데자이언츠 경기에서 특별한 시구 시타가 펼쳐졌다. 1927년생 98세의 6.25 참전 공군 조종사인 김두만 장군이 시구에 나섰다.1949년 학사사관 5기로 임관한 김두만 장군은 6.25 전쟁 때 총 102회 출격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100회 출격한 기록을 갖고 있다. 공군 작전사령관, 제 11대 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한 김 장군은 을지무공훈장, 은성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고, 6.25 전쟁 10대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이자 대한민국 공군 창군 멤버였던 김신장군기념사업회장을 맡아 공군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김 장군은 이날 시구를 마친 후 “전쟁 때 백 번 넘게 출격했는데, 이렇게 세월이 흘러 오늘 만원 관중 앞에서 시구까지 하게 됐습니다. 강호륜 장군 손자가 저렇게 훌륭하게 커서 F-15K 조종사가 된 걸 보니 기쁘고, 안전하게 비행 잘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이날 시타는 김 장군의 동료 참전 조종사 고 강호륜 장군의 손자인 강병준 소령이 맡았는데, 현재 공군 제 11전투비행단 제 102전투비행대대에서 3편대장을 맡고 있다. 할아버지 고 강호륜 장군은 전쟁 중 평양 대폭격작전 등 총 78회 출격했다.  이날 특별한 두 사람의 시구 시타 행사 직전 공군 F-15K 편대가 경기장 위에서 기념비행을 하기도 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6-06
    • 좋아요
    •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