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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이 되면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현장을 정치인들이 방문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찾아가고, 낙후된 주거지를 둘러보고, 시장에서 상인들과 악수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정치인들이 현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일까요? 그런 목적도 없지 않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사진에 등장한다는 건 단순한 ‘보여주기’가 아니라 적어도 그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표시로 읽혀야 합니다. ‘지켜보고 있다’는 말에는 ‘챙기겠다’, ‘함께하겠다’,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요즘 서울의 거리를 걸으며 토굴이나 움막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높게 솟은 빌딩과 바쁘게 오가는 인파 사이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 만든 주거 형태는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불과 백 년 전 서울 종로 서대문 동대문 일대에는 실제로 토굴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토굴(土窟)’이란 말 그대로 땅을 파 만든 움막을 뜻합니다. 집도 방도 아닌 그저 비와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임시거처였습니다. 1925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종로경찰서 관내 토굴 빈민 15가구에 대한 보도가 실렸습니다. 기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봄은 가고 여름은 오는데 하루 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날그날의 먹이를 구하다가 저녁이 되면 저물어 가는 해의 그늘을 따라 침침하고 후덥은 토굴(土窟) 거적자리로 기어 들어가는 토굴 생활자가 얼마나 되는가. 서대문과 동대문 두 곳 관내에 대해서는 이미 보도한 바 있으므로 이제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거니와 다음으로 종로경찰서 관내의 통계를 들어보면 총 호수가15호에 인구가 51명인데, 그 중 40명이 남자이고 11명이 여자이라는데 본정서 관내의 9호 47명과 함께 시내 경찰서 중 가장 적은 수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흩어져 사는 곳을 보면 경운동(慶雲洞) 96번지에 1호 3명이 살고, 원동(苑洞) 241, 27번지 등 관유지 안에 3호 10명이며, 광화문통(光化門通) 1번지 총독부 산림 속에 역시 3호 10명이요, 루하동(樓下洞) 242번지 리완용후(李完用侯) 소유 토지 안에 3호 4명, 서대문 밖 행촌동(杏村洞)으로 넘어가는 성지, 즉 사직동(社稷洞) 보안림(保安林)안에 4호 17명이며 도렴동(都染洞) 105번지 양정고등보통학교 옛터에 1호 일곱 명이 살고 있다는데,그중 여자와 함께 사는 곳은 경운동과 루하동 사직동 세곳으로 경운동이 한명 루하동이 두명 사직동 여섯명이라하며 움집살이는 움집살이나 어쨌든 순전히 토굴은 아닌 반토굴 반가옥의 움집 생활자가 38호로 전기 15호를 합하면 전부 53호인데 그들의 직업을 들어보면,▲ 날품팔이 24▲ 모군 4▲ 지게군 5▲ 車夫 6▲ 職工 5▲ 雇傭人 7▲ 行商賣藥等 6▲ 飮食店 떡장사 3▲ 도배군 1▲ 配達夫 1▲ 상두군 1▲ 洗濯業 1▲ 其外 거지若 약간인데 그 중 제일 수입이 많기는 도배군으로 그는 하루에 일원 50전까지도 벌 때가 있다하며 그와 반대로 지게군 날품팔이 등이 제일 수입이 적은데 운수가 틔여야 50~60전 돈을 벌게 되는 외에는 대개는 30전 내외인데 그나마 날이 궂은 날 같은 때에는 한 푼 벌이를 하지 못하게 되는 때도 있다고 한다. 1925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종로경찰서 관내의 토굴빈민 15호 - 가장 많기는 사직골 부근, 직업은 날품팔이가 제일”토굴과 움막의 삶을 담은 사진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1924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움막 사진이 실린 사례가 있습니다. 지금의 서울 을지로 부근입니다. 그리고 1960년 12월 31일자 기사에는 윤보선 당시 대통령이 서울 용산역 인근 토굴을 방문한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연말 민정 시찰 중에 대통령이 토굴을 직접 찾았다는 것은 단순한 퍼포먼스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직접 보고 듣고 해결책을 찾겠다는 메시지로 읽힙니다.이처럼 토굴과 움막은 1920년대부터 최소 40년간 사회적·정치적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런 주거 형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최근 다시 선거철이 찾아오며, 각 정당의 후보들이 서민의 삶의 현장을 찾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습니다. 기호 1번, 2번, 4번 후보들 모두가 거리와 시장, 쪽방촌을 찾아 사진을 찍습니다. 물론 그들이 5년 임기 동안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이 진심이고 그 관심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작지만 분명한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선거철마다 넘쳐나는 고해상도의 후보들 사진을 보면서 문득 그런 기대가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왕년에 그라운드를 누볐던 역사를 몸이 기억하는 걸까요. 고교 야구선수들 앞에서 심판이 팔굽혀펴기를 선보입니다. ―서울 양천구 목동야구장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제79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16강전이 열린 5월 13일 목동야구장. 이날 그라운드에서 가장 많은 셔터를 받은 선수는 단연 김성준(18·광주제일고)이었다. 카메라 기자들의 시선은 경기 전부터 그를 좇았고, 관중의 기대는 묵직하게 그에게 실려 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한국의 오타니’라 불리며 투타 겸업 유망주로 주목받아온 김성준이 미국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와 130만 달러(약 18억 원)의 계약을 사실상 확정지은 직후, 처음으로 나서는 공식 경기였기 때문이다.경기 초반 흐름은 김성준의 스타성과 비례했다. 3번 타자이자 2루수로 선발 출전한 그는 1회초 첫 타석에서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날렸고, 후속타에 이어 홈을 밟으며 팀에 선취점을 안겼다. 경기 초반만 놓고 보면 영화 같은 시나리오였다. 김성준은 2회까지 4-0으로 앞선 팀 분위기를 이끌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러나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광주제일고의 흐름은 3회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북고가 집중력을 높이며 점수 차를 서서히 좁혔다. 4회말 무사 1,3루 상황에서 광주제일고는 김성준을 마운드에 올렸다. 마운드 위 김성준은 시속 153km의 강속구를 뿌리며 투지로 응수했지만, 결과는 녹록지 않았다. 유격수의 실책이 겹치고, 희생플라이로 점수가 추가되면서 4-3, 턱밑까지 추격을 허용했다.5회말, 드라마의 전환점이자 김성준의 고교 마지막 등판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김성준은 이닝 중 5안타와 볼넷 하나를 허용하며 무려 6실점. 특히 2사 2루에서 경북고 이승빈에게 맞은 쐐기 2점 홈런은 뼈아팠다. 결국 김성준은 마운드를 내려가 다시 2루수로 돌아갔지만, 그 표정은 흔들림 없는 담담함 속에 복잡한 감정이 얹혀 있었다. 경기 뒤 그는 인터뷰 없이 조용히 경기장을 떠났다.경기는 경북고의 11-4, 7회 콜드게임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날의 패자는 결코 조연이 아니었다. 김성준은 경기를 통해 여전히 자신이 ‘이름값’을 지닌 선수임을 증명했다. 마운드에서는 결과가 아쉬웠지만, 타석에서의 집중력과 멀티 포지션 소화 능력은 MLB 팀이 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했다.김성준은 15일 미국으로 출국해 18일 텍사스와의 정식 계약을 앞두고 있다. 185cm, 83kg의 체격에 최고 구속 시속 154km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김성준은 고교 시즌 동안 마운드에서 2승 1패 평균자책 1.13, 타석에서는 타율 0.333에 1홈런 8타점 3도루를 기록했다.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하는 데다 강한 멘탈과 기본기까지 겸비했다는 점에서 MLB에서도 투타 겸업을 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미국 구단들이 ‘한국의 오타니’라며 주목한 이유는 단순한 수치 너머에 있다. 김성준은 경기 전후로 자신이 흘린 땀과 주변을 돌아보는 태도까지도 ‘프로’의 품격으로 보여주었다. 평소에도 팀 훈련이 끝난 뒤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줍는 모습에서, 자신이 닮고자 하는 오타니의 진짜 모습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다.“투타 모두에서 지지 않는다”는 그의 말처럼, 오늘의 패배는 김성준에게 내일을 위한 불씨가 될 것이다. 목동야구장에서 그의 마지막 황금사자기는 끝났지만, 그의 야구는 이제 막 시작됐다. 사진 속 그가 하늘을 바라보던 모습처럼, 김성준의 시선은 이미 더 넓은 무대, 더 치열한 도전을 향해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콘크리트 바닥 틈새로 풀들이 줄지어 자라고 있습니다. 공사하신 분들의 실수였을까요, 배려였을까요? ―경북 김천종합스포츠타운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100년 전 운동회‘백년사진’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연재입니다. 이번 주 100년 전 신문에는 유난히 사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장면이 없었습니다.청량리 들판에서 밭을 일구는 황소 달구지와 농부, 창경궁으로 추정되는 연못가의 오리떼, 장충단 공원의 푸른 잔디를 바라보는 소녀들, 그리고 다양한 스포츠 행사 사진들. 그러나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특별히 소개할 만한 인상적인 비주얼은 아니었습니다. 독자들의 눈높이가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장면에는 쉽게 놀라지 않습니다.하지만 100년 전, 당시 사진기자들이 그 장면들을 찍고, 신문 지면에 실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1925년 5월 8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학생 운동회 사진이 실렸습니다. 이틀 뒤인 5월 10일자에는 전국 축구대회 개막 소식과 함께 운동장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 게재되었습니다.오늘날 같으면 골을 넣는 순간이나 환호하는 장면이 실렸을 법한데, 당시에는 관중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넓은 그라운드가 대표 이미지였습니다.사진 왼쪽 아래, 둥근 물체는 구경 나온 아가씨의 양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성 관중 사이에 끼지 않고 좀 더 거리를 둔 게 사진의 원근감을 주는 요소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넓은 앵글, 요즘 스마트폰의 파노라마 촬영 기능을 연상시키는 구도는 새삼 놀랍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사진 촬영과 보여주기의 방식이 확연히 느껴집니다.● 변화하는 스펙타클의 풍경100년 전 5월, 다양한 스포츠 행사가 잇달아 열렸습니다. 시민들과 신문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대단한 볼거리’였던 듯합니다.5월 5일자 2면에는 “오는 6월 초순, 제12회 조선여자정구대회가 열릴 예정이며 곧 상세한 계획을 알릴 것”이라는 안내기사가 실렸습니다. 서울, 개성, 도쿄 등지에서 펼쳐진 승부와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청춘들의 모습은 하나의 스펙타클이었고, 당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 지면에 꼭 한 장씩, 그 풍경이 담겼던 것이겠죠.스펙타클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붙잡는 장치입니다. 사회적 감정이 움직이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누가 주최하고, 누가 조명되며, 무엇이 강조되는가에 따라 그 시대의 의도와 욕망이 드러납니다.청년회가 주최하고 언론이 주목한 일련의 체육행사는 단순한 운동경기를 넘어서, 그 시대를 사는 이들의 몸짓과 감정, 의지를 담은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식민지의 억압 속에서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누워 있지 않겠다는 조용한 저항이었을 것입니다. “몸이라도 건강하자”는 다짐,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는 외침이었겠지요.● 오늘의 스펙타클, 그 양면성지금은 볼거리의 종류도 많고, 기술은 더 화려해졌습니다. 일상 곳곳이 스펙타클이고 놀라운 장면은 넘쳐납니다. 그리고 이 스펙타클은 곧 ‘자본’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 영향력을 키우는 것. 에너지음료 브랜드가 익스트림 스포츠 이벤트를 여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시대가 달라지며 스펙타클도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여전히 그것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붙잡고, 붙잡은 마음을 통해 무언가를 이룹니다.100년 전 청년회가 건강과 자긍심을 원했다면, 지금의 이벤트 주최자들은 돈과 대중의 지지를 원합니다.정치도 예외가 아닙니다.요즘의 정치 무대는 거대한 전광판, 수천 대의 스마트폰 카메라, 각종 이미지 전략과 퍼포먼스로 가득합니다. 후보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정치인의 얼굴과 연설은 하나의 콘텐츠가 됩니다.유권자들은 마치 100년 전 운동회 관중처럼 열광하지만, 그 열광이 항상 주최자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만은 않습니다. 최근 국민의힘 대선 후보 선출 과정을 보면 그 단면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긴 했지만 오히려 ‘희화화’되는 최악의 효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눈은 붙잡았으나 마음은 전혀 못 잡고 있습니다. 그게 원했던 목표였다면 성공입니다. ● 다시, 스펙타클의 본질을 묻다100년 전, 축구장의 한 컷은 ‘살아 있음’의 증거였고, 지금은 그것이 이미지 정치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스펙타클은 시대를 관통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마주한 이 스펙타클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가를 물어야 할 시점입니다.‘볼거리’가 곧 ‘권력’이 되는 시대, 우리는 어떤 장면을 응시하고, 어떤 장면에 박수를 보내고 있을까요? 오늘은 100년 전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온 국민의 눈을 집중시켰던 스포츠 이벤트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557번 상추, 517번 고추…. 도시 농부들이 두 평 남짓한 주말농장에서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습니다. 펜스를 치고 부지런히 물도 줍니다. 텃밭에 직접 심고 가꾼 채소를 곧 수확해 식탁에 올릴 마음에 발걸음이 가볍습니다.―경기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백년사진’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오늘날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연재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주는 조금 바쁘게 보냈습니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열리고 있는 ‘제 97회 동아 수영대회’ 사진 취재를 위한 출장 중이기 때문입니다. 화요일부터 오늘 토요일까지 이어지는 일정 동안, 전국에서 모인 초등학생부터 일반 선수들까지 수영인들이 자웅을 겨루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경영 다이빙 수구 등 60~80 종류의 예선과 결선이 펼쳐지는데요, 모든 장면을 다 촬영해 기사용 사진으로 마감하지는 않습니다. 스토리가 있거나 시각적으로 흥미를 끌 만한 장면들만 선별해서 보도용으로 전송합니다. 물론 모든 경기가 소중하고, 각 선수와 가족들이 지난 한 해 동안 쏟았던 노력을 생각하면 어느 순간 하나 버릴 수 없는 장면들이지만, 사진기자는 언제나 ‘선택’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 단체사진, 어디까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이런 가운데, 백년 전 이번 주 신문을 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단체사진은 몇 명까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었습니다. 1925년 5월 3일자에 동아일보에는 신문사를 견학하러 온 지방 학생들 얼굴이 실렸습니다. 이 사진 속 52명의 얼굴은 신문 지면에서도 꽤 뚜렷하게 식별됩니다. 그럼 만약 300명, 500명, 혹은 1천 명의 단체사진이 신문에 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신문 지면에서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 인원수는 제한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천 명 정도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사진이 차지하는 면적을 극단적으로 키우는 조건에서만 그렇습니다. 기사 본문은 최소화하고 지면의 80~90%를 사진을 할애해야 겨우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1만 명은 어떨까요? 제 판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 신문에 얼굴을 담는 물리적 한계요즘 발행되는 신문의 본문 글자는 보통 11포인트입니다. 이는 현대 독자가 식별할 수 있는 최소 글자 크기로, 신문 한 개면을 빽빽하게 채우면 200자 원고지 기준 25장 정도, 약 5,000자의 글을 담을 수 있습니다. 사진 속 얼굴도 최소한 이 정도 크기는 되어야 누군지 식별할 수 있겠죠.신문은 보통 가로 기준으로 5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진은 크기에 따라 1단 사진, 2단 사진, 3단 사진, 4단 사진, 통단 사진으로 구별됩니다. 글자수를 세어보면 1개의 단에는 대략 25자 정도의 글이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1단 사진에는 25명 정도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사람 얼굴이 글자처럼 옆 사람과 딱 붙어 있을 수는 없으므로 적당한 간격을 둔다면 1단 크기 사진에 들어갈 수 있는 인물은 맨 앞줄 기준 최대 10명 내외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앨범처럼 촘촘히 배열하더라도 제한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는 인원을 찍은 사진이 지면에 실리면 결국 ‘모두를 보여주려다 모두를 놓치게 되는’ 역설이 생깁니다. 각종 동창회 소식지나 기관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의 단체사진이 독자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많은 얼굴을 담으려는 욕심이, 오히려 어느 누구도 돋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 p.s. 기분 좋아지는 사진 한 장, 삼청동의 빨래터오늘 소개한 단체사진은 사실 그 자체로는 특별한 재미가 있는 사진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진을 좋아하실 분들을 위해 1925년 4월 29일자 신문에 실린, 삼청동 빨래터 사진을 함께 공유합니다. 지금은 카페와 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터로 유명한 서울 삼청동 계곡에서 우리의 할머니들이 빨래 방망이질을 하거나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존대말로 상황을 설명하는 사진설명도 흥미롭습니다. 사진 속 왼쪽 아래 부인이 힘차게 휘두르는 빨래방망이가 ‘토드락토드락’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연휴도 평안하고 따뜻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저도 오늘 수영대회가 폐막하면 서울로 돌아갑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지하철역 출구 계단에서 한 남성이 구두 끈을 묶고 있네요. 단단히 동여맨 구두와 함께 하루를 야무지게 보냈길 바랍니다. ―서울 중구 시청역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어느 건물 계단 아래에 자그마한 공간이 마련돼 있네요. 고양이나 강아지가 살면 딱이겠어요.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동요 <반달> 작곡가의 젊은 시절 모습이번 주 100년 전 사진이 고른 사진은 우리에게 익숙한 동요 작곡가 윤극영 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입니다. 22살 앳된 청년의 모습입니다. 내용을 떠나 사진기자인 저에게 특별하게 이 사진이 느껴진 점은, 등장 인물들의 크기였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기사의 주인공인 가운데 양복입은 남성과 양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학생들의 모습이 같은 크기 또는 오히려 학생들이 크게 표현된 점입니다. 보여주는 기자나, 보는 독자나 모두 저 사진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사진기자라면 아마 피아노 앞 청년을 크게 묘사하기 위해 카메라 앞으로 배치하고 두 여학들생들을 작게 표현할 수 있는 앵글을 선택할텐데 말이죠. 100년 전 우리 사회의 ‘시각 체계’ 또는 ‘보는 방식’이 지금과는 달랐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뉴스 인물에게 위계나 특별함을 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3명의 인물 사진이 밋밋하고 너무 평범하게 느끼듯이 거꾸로 그 시절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주제가 강조되는 사진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사진은 정치 사회의 영향을 받아 자꾸 변할 수 있다는 생각도 아울러 해봅니다. 거리의 시민들 얼굴을 쉽게 촬영해 신문에 실을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점과 어제는 증거로 활용된 사진이 오늘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크롭(crop)’되었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이 있듯이 말입니다. 법이 시각 체계를 바꿀 수 있는지는 시간이 증명하겠지요. 본론으로 들어가 사진의 설명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청년 작곡가로 유명한 윤극영군의 지휘 하에 『서울코러쓰』 조직■청년 작곡가로 유명한 윤극영군의 지휘 하에 위에 보이는 사진은 『설날』『반달』『소금쟁이』『허잡이』 등 아름다운 동요를 삼십여 종이나 작곡하여 발표하고 친히 어린이들을 모아 교수하며 수 만의 어린이에게 새로웁고 고운 노래를 부르게 한 청년 작곡가 윤극영 (尹克榮)(22)씨가 어린이에게 성악을 교수하는 사진인데 그는 다년 동경에 유학하여 성악가로 유명한 선교영길(船橋英吉)씨에게 사습하였는데 금년 봄 부터는 『서울 코러쓰』를 조직하고 남녀회원 삼십여명을 모집하여 개인으로 교수하리라더라.-1925년 4월 20일자 동아일보● 지금도 사랑받는 동시 <반달>의 가사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윤극영(1903∼1988)● 동심과 함께 산 인생 - 그의 부고 기사 제목그의 삶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서 윤극영으로 검색을 하니 총 161건의 기사가 검색됩니다. 문학평론가 나민애님은 2022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349회 글에서 “그는 동요 작사가이면서 동시에 동시 시인이었다. ‘반달’이라는 시를 노래로 불러보면 금방 동의할 수 있다. 음정도 음정이지만 저 노랫말은 우리를 그립고 먼 나라로 데려다준다. 보지 못한 장면을 보게 하고 꿈꾸지 못한 꿈을 꾸게 한다”고 윤극영 작사가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 기사들이 있지만, 한 개인의 삶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글은 아마 고인이 영면에 들어간 다음 날 신문에 실린 부고(訃告) 기사일 것입니다. 아래는, 1988년 11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윤극영 선생의 부고 기사입니다. 사진 속 22살의 청년에 대한 65년 후 세상의 평가입니다. ■童心(동심)과 함께 산 平生(평생)他界(타계)한 尹克榮옹『반달』 『고드름』 『따오기』 등 주옥 (珠玉) 같은 동요 남겨■15일 타계한 원로 동요작사작곡가 尹克榮선생은 「반달 할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 어린이문화운동의선구자였다.고인은 1903년 서울태생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중퇴하고 日本으로 건너가 東京음악학교 동양엄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우리말과 노래를 빼앗긴 채 암울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위해 23년에는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선생과 함께 東京에서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효시인「색동회」를 발족시켰다. 그당시 「씩씩하게 참되게 그리고 아름답게 서로서로 도와갑시다」라는 것을 주제로 내세웠다.24년에 귀국하여 동요단체인 「다알리아회」를 조직、우리노래 보급운동에 나섰는데 이때 작곡한 동요가 『반달』 『까치까치 설날』 『할미꽃』 『고드름』 『따오기』 등 오늘날까지 어린이나 어른등 모든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주옥같은 노래들이었다. 한때 간도(間島)에서 교편생활을、「하얼빈」에서 예술활동을 하기도 했다.그의 한평생은 『반달』과 떼어놓고 얘기할수 없는 삶이었다. 그는 “『반달』은 내가 만든 것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를 완전히 지배해왔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6·25 동란중 피난시절에는 생활이 어려워 『반달』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어썼다는 에피소드도 있다.음악전문교육을 받고 동요작사 작곡에 일생을 바쳐온 선생은 작사 작곡을 병행해온데 대해 “가락이 없는 詩가있을수없고 시의 리듬을 잡지못하는 노래가 있을 수 없다. 작곡과 작사는 손의 안팎과 같은 관계”라고 얘기하곤 했다.선생은 동요 4백여곡、동시1백 여편을 남겼지만 어린이운동에 전념해 왔을 뿐 별다른 직업이 없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자세로 평생을 살아왔다.그는 감투라고는 윤번제로하는 색동회회장 이외에 써본 일이 없는데 이름 석자도 과분하다고하여 아호(雅號)도 몇 번 지었다가 버렸다고 한다.건강이 허락하기까지 매일새벽 2、3시경에 일어나 원고청탁이 있건 없건 간에 항상 책상 앞에 앉아 원고지를 마주 했으며 동요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인「友林會」에서 강연을 하고 이들과 어울려 동심회복운동과 동심문화교육을 펼쳐왔다.56년 제1회소파상을 수상했으며 63년 서울교육대학이 제정한 「고마우신 선생님」에 추대됐다.대한민국국민훈장 목련상을 받았으며 86년10월「동요의 날」 초대 대상을 았다. 「반달」노래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구절인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처럼 선생은 먼길을 떠났다.〈高美錫기자〉/ 1988년 11월 16일자 동아일보(석간) 14면.오늘은 유학 후 돌아와 한국의 동심을 위해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20대 청년의 사진과 그 이후 그의 삶을 정리한 부고 기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좋은 댓글로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인근에서 한강버스의 화재, 기관 고장, 기름 유출 등을 가정한 민관 합동 현장 대응 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이날 훈련은 상반기 정식 운항을 앞둔 한강버스의 수난사고 대응 역량을 점검하기 위해 실시됐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카페 안 작은 화분에 담긴 식물들이 창밖 잡초를 바라봅니다. 실내가 더 안온하지만, 누가 더 오래 살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요. ―충남 부여군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주제관에서 관람객들이 국립극장 무대에 올랐던 의상을 살펴보고 있다. 이달 2일 개막한 ‘공연 예술, 시대를 담다’ 전시에서는 20세기 이후 한국 근현대 공연예술의 흐름과 변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어느 봄밤, 까치 10여 마리가 나무에 한데 모여 앉아 있네요. 사람의 눈을 피해 까치도 봄을 만끽하나 봅니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궂은 날씨에 ‘벚꽃 엔딩’이 일러져 아쉬우신가요. 우리만 그런 건 아닌가 봅니다. 직박구리도 벚꽃이 질라 서둘러 머리를 박고 꿀을 먹네요. ―경기 화성시 실내체육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00년 전에 전람회장 역할을 했던 서울 인사동의 건물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삶을 돌아보는 ‘백년사진’입니다.이번 주 신문(1925년 4월 13일 ~ 4월 19일)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많았습니다. 봄이 되니 행사도 많고, 자연히 카메라 셔터를 누를 일도 많아졌기 때문일 겁니다.1925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7면 전체를 채운 ‘두만강 건너 북간도’ 사진과 관련 기사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 지방 순회 - 정면 측면에서 본 회령의 겉과 속”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당시 기자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거침없이 지역의 현실을 기록한 점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이라 이 코너를 통해 전해 드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권력에게 때론 무례하기도 한 기자정신을 개인적으로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일제 통치와 상관없이 사상계 교육계 경젝메 및 민간단체 들이 자체 활동하고 있는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었습니다.그 외에도 여러 흥미로운 사진들이 연이어 실렸습니다.4월 13일자에는 영변 유치원의 보육증서 수여식 장면이 있었고,4월 14일자에는 청량리의 봄 풍경,4월 15일자에는 장충단 공원의 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4월 18일자에는 조선기자대회 관련 사진도 있었습니다.그 가운데 오늘 제가 고른 사진은 ‘태화여자관 수예 전람회’입니다. 전람회 사진의 전형적인 구성입니다. 연출된 장면, 그리고 사진의 빈 공간을 관람객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 지금의 전시회 사진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평범한 앵글의 사진이지만, 100년 전 서울의 중심가 어디선가 전시회가 이뤄졌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규모야 작았겠지만 마치 서울 강남 코엑스나 일산 킨텍스, 부산 벡스코처럼 말입니다. 제 궁금증은 “전람회가 열린 저 건물은 무슨 건물이었을까?”였습니다. 관청이었을지 상업용 공간이었을지. 우선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의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태화여자관 수예품 전람회 (1925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시내 인사동에 있는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에서는 어제 18일에 강당에서 수예 전람회가 있었는데 장내 벽에는 순(純)조선 사람들의 힘으로 된 송고직(松高織)의 오색이 영롱한 필목이 늘어져 있어서 장내를 환하게 하였다. 출품은 노력을 짜서 공부하는 고학생들의 손으로 만든 것인데 한 살부터 십 세 이상의 남녀 아동의 양복을 미국식으로 만들어 걸려 있어서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하여 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리 만큼 탐이 나게 하며 그 외에 남녀의 속옷 와이삿즈, 침의, 침대홋이불, 전등 갓 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 바, 다 바탕은 송고직이였고 다과점 같은 것도 있었는데 관람객이 자못 답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더라.● 친일 이완용의 저택에서 낭독된 독립선언문 사진의 실마리를 잡고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주 독립운동가들 기사를 소개드렸는데, 사진 자체보다는 사진을 둘러싼 이야기와 역사를 좋아하시는 독자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도 사진을 통해 나타난 시대의 흐름과 사진의 맥락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진 속 건물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같은 이름의 건물이 새로 올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9번지에 가면, ‘태화빌딩’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서 있습니다. 그 건물의 이름 속에는 우리가 잊고 지낸 100년 전의 시간들이 조용히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인사동 옛 순화궁 터에 있었던 태화여자관은 원래 친일파 이완용의 저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안순환이라는 인물이 이 집을 임대해 ‘태화관’이라는 요리집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태화관 후원에 있던 ‘별유천지 6호실’에서 낭독된 독립선언문은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미국 남감리회에서 사회 봉사 활동을 위해 건물 매입3·1운동 이후, 이완용이 이 저택을 매물로 내놓았고 (혹자는 터가 너무 강해서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이를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부에서 매입한 뒤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1921년 ‘태화여자관’이라는 사회사업 기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은 한국 최초의 사회복지재단으로 평가되며, 사회교육과 영유아 보건 사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참고: 서울역사박물관 학술총서 제17권 『100년 전 선교사, 서울을 기록하다』)이후 태화여자관은 근우회, YWCA, 조선여자청년회 등 여성운동 단체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직업부인협회, 가정부인협회, 연합영아보건회, 연합아동보건회 등의 활동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초기에는 여성의 교육과 자립을 돕는 시설로 출발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아와 빈곤층을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기독교 신앙 교육을 바탕으로 유치원, 탁아소, 성경학원, 요리 및 재봉 교육, 영어 교육까지 다양한 영역의 교육 활동을 펼쳤습니다.● 서울 재개발로 빌딩으로 탈바꿈… 봉사는 명맥이어져1939년에는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3층 석조 건물로 새롭게 지었고, 1978년 서울시의 재개발 계획에 따라 이 건물도 철거되고 오늘날의 태화빌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교육 기능은 1936년 ‘성신여학교’로 승계되었으며, 현재 태화복지재단은 인사동 태화빌딩 4층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 재단은 전국에서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동시에,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도 활발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참고 문헌##: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 『믿음의 흔적을 찾아』김태은, 『3.1정신과 여성교육 100년』태화복지재단 홈페이지오늘은 서울 인사동 초입에 위치한 흰색 건물 안에서 100년 전 있었던 전람회 풍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변천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풍경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머금고 있는 거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 이야기에서 어떤 점을 느끼셨나요?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함께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강아지가 두 앞발로 문을 딛고 빵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네요. 한시라도 주인이 곁에 없으면 걱정이 되나 봅니다. ―경기 광명시 광명사거리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생과방에서 관람객들이 조선시대 왕실의 별식을 재현한 궁중다과와 궁중약차를 체험하고 있다. 다과 6종과 약차 1종으로 구성된 이 체험은 국가유산청이 주최하는 행사로, 전통 방식으로 다과를 즐기며 경복궁에서 조선시대 문화를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마련됐다. 행사는 6월 23일까지 진행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봄을 맞아 어딘가에 심겨질 나무가 트럭에 실려 이순신 동상 옆을 지나갑니다. 우리 옆에서 신선한 산소를 많이 내뿜어주기를 기대할게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여기 한 여성과 아이의 사진이 있습니다. 웃지 못하고 멍하거나 힘든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1925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안중근 의사의 동생 가족 입니다. 안중근 선생은 그의 나이 29살이던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일본 이토 히로부미를 총을 쏘아 사살하고 이듬해 사형당했습니다. 안 의사의 희생은 역사책 뿐 아니라 소설과 영화로 우리 가슴을 뛰게 합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안 의사의 죽음 이후 15년이 지나는 동안 남아 있던 가족들이 어떻게 삶을 버티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사진과 함께 오늘 소개하는 기사는 1925년 4월 10일과 4월 13일 이틀에 걸쳐 실린 “안중근의 계수(季嫂) 최씨 부인의 애화”입니다. 계수는 남자 형제 사이에서 동생의 아내를 이르는 말입니다. 특히 남자 형제가 여러 명일 경우 막내의 부인을 이르는 말입니다. ‘애화(哀話)’라는 부제처럼, 이 이야기는 단순한 가족 비극을 넘어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겪은 박해와 빈곤, 사회적 냉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희생과 의로움이 당시 남아 있던 친척들에게는 오히려 낙인이 되고 고난의 이유가 되었던 현실이 강조됩니다. 다만 피붙이보다 김원식이라는 무명의 청년과 아이의 담임 선생님의 인류애가 그나마 아직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체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부 요약: “정처 없이 떠나 자유로운 땅을 찾아”안중근의 셋째 동생 봉근은 큰형 안중근의 사형과 둘째 형 명근의 옥살이에 절망하여, 아내와 세 아들을 고향 해주에 두고 망명을 결심.부인 최씨는 세 아이를 키우며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음.점점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며 형제 집에서 구박을 받고, 옹기장사, 유기장사, 행상 등 온갖 일을 해가며 자식들을 키움.맏아들 창익은 학교 졸업 후 재판소와 도청에서 일했으나, ‘안중근 조카’라는 이유로 해고됨. 이후 체신리원 양성소에 합격하여 상경.● 2부 요약: “기러기 나는 계절이면 베개에 떨어지는 눈물”창익이 상경한 뒤 남은 가족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짐.둘째 아들 창준은 굶주림으로 학교에서 졸도, 급우들과 교사들이 도움을 줌.해주 식당에서 일하는 김원식 청년이 매달 25원씩 후원, 가족의 유일한 생계줄이 됨.그러나 친정 식구들의 냉대, 동생마저 형제를 외면하고, 개가를 권유받는 등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이어짐.남편을 찾아 상해로 떠날 결심을 품음.안중근의 계수 최씨 부인의 애화● 1부 (1925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자유로운 땅을 찾아 정처없이 떠나북만주 하얼빈역에서 한번 울린 피스톨의 음향과 함께 교수대 위에서 원한의 눈물을 뿌리고 한 방울 이슬이 된 안중근(安重根)은 4형제인데, 셋째 동생인 봉근(奉根)씨는 큰 형님의 원한 깊은 죽음과 둘째 형님 명근씨의 5년 간의 철창 생활 모든 것이 가슴에 불이 붙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봉근씨는 모든 불합리한 비분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자유가 없는 땅을 벗어나자는 유지대로 『민족을 위하여』라는 굳은 결심으로 사랑하는 아내 최씨 부인(30세)과 당시 5세부터 한 살 된 아들까지 삼형제를 쪽박에 밤 쏟듯이 남겨 두고 정처없는 발길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봉근 씨가 임금 같이 붉고 통통한 어린 뺨 위에 주먹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석별의 애타는 키스를 어린 이마에 던진 후에 의지할 곳 없는 젊은 부인과 다시 성공하는 날을 굳게 언약하고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나도 다시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 고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러기 나는 계절이면 베게에 떨어지는 눈물봉근씨를 떠나 보낸 최씨 부인은 굳은 의지를 가진 이로 남편과 같이 즐기던 고향 해주(海州) 땅에서 다시 만나겠다는 결심으로 어린 아들 3형제를 거느리고 짤막짤막하게 전하는 소식을 더 없는 낙으로 삼으며 2,3년간은 두고 간 재산으로 어렵지 않게 생활을 하였습니다. 날이 가고 밤이 가면서 청춘에 끝없는 정서를 풀 곳이 없고 오직 가을 하늘에 짝 잃은 외로운 기러기 날아올 때 청량한 가을 달이 뒷창으로 근심과 초조와 고독과 번민에 찌들어 파리한 그의 얼굴을 비출 때 그는 세상에 고락을 모르는 어린 세 생명의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내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외로운 베게머리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며 보통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들들이 작문을 지을 때 아버지를 그리는 글을 지어 가지고 어머니 앞에서 읽을 때 그의 가슴이 메여 터지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나 어린 자식의 나날이 느는 재주에 가슴에 막히는 설움이 위로를 받았답니다.◇ 행상을 떠나 옹기 장사가 되어그러나 이 불행한 최씨 부인에게는 또 다시 쓴(苦) 운명의 신이 농락의 손을 그 머리 위에 내렸습니다. 그것은 아무 직없이 없어 수입이 없이 소비만으로 3년이나 쓰고 나니 호구할 방책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할 수 없이 떠날 때 부탁하여 둔 친정되는 해주 서영정에 있는 오라버니의 집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 오라버니는 상당하 재산가로서 불상한 누이 한 사람을 거두지 못할 경우는 아니었으나 세상의 인심은 물욕과 함께 어두어져서 오히려 그 여섯 식구가 그에게는 눈에 가시같기도 하였답니다. 자활(自活)의 정신이 많은 최씨 부인은 그곳에 있음이 심히 괴로웠으나 어린 아들을 학교에 보낼 때 찬밥 덩이라도 한 숟가락씩 먹여 보내기 위하여 모든 굴욕을 무릅쓰고 그 집에 있으면 낮에는 옹기장사 유기장사를 하노라고 연약한 몸에 주린 배를 졸라 매고 동으로 서로 행상하러 다녔답니다. 이리하여 겨우 끼니는 이었으나 그 역시 살 길이 망연하였으므로 눈물을 머금고라도 친가에 기식(寄食)하는 설움을 당치 아니치 못하게 되어 몸이 가루가 되도록 안팎 일을 모조리 보아 주었답니다.◇안씨 조카라고 간 데마다 내쫓겨이렇게 지내는 중에 맏아들 창익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어머니의 정경을 살펴 어린 몸으로 마음에 없는 재판소에 급사(給使) 노릇을 하며 밤에는 혼자 책을 읽어 수양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만은 재판소에서는 안중근의 조카라는 혐의로 해고를 하여 버렸습니다. 그 후에 또 도청에 들어갔었지만 다시 나오게 되어 창익은 이를 갈고 쓴 눈물을 뿌리며 할 수 없이 손을 맞잡고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 최씨는 그래도 어린 목숨을 위하여 친정에서 쌀을 구걸하였으나 두세 번에 응치 않고 나중에는 할 수 없이 호미(胡米)를 주며 다시 오지 못하게 하였음으로 최씨는 이런 창피하고 쓰린 경우를 당함이 한번뿐이 아니었으므로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비분이 세상에 부모동기의 무정을 원망하고 얻은 호미를 내던진 때도 있었답니다.그 동안 창익은 다행히 경성체신리원 양성소(京城遞信吏員養成所)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되어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면서 창익은 일년 후에는 이 괴로움이 적어지리라는 것을 굳게굳게 예약하였답니다.● 2부 (1925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어린 아들 창준이가 배고파서 넘어져이와 같이 창익이가 하루 아침에 불쌍한 어머니와 동생을 두고 간 뒤에 그들의 생활은 더 참담하였습니다. 그 고통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정신적은 물론이지마는 더욱이 물질상으로 심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최씨 부인은 남의 빨래를 빨고 또는 남의 집 곁방 살이를 하여가며 아침저녁으로 연명이나 하여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아들들을 공부시키기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이런 역경에 있는 최씨 부인에게는 다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액상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어떤 하루 날 창준(昌俊)이가 학교에서 우연히 졸도한 일이 있다. 이것은 심한 공복증(空腹症)으로 그윽한 정신에 피로로 인함이었었는데 이와 같이 졸도하매 같은 반 동무 아이들이 이왕부터 마음착하고 공부잘하며 우의가 있는 창준이가 가세가 곤란하여 굶고 다니는 것을 알았으므로 아이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이 어린 창준이를 구하기 위하여 단돈 몇 십 전씩을 거두기로 하여 붉은 맘에 참된 동정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아이들의 진실된 행동에 그 반 담임 선생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 후부터 자기의 박봉을 뜯어서 어린 창준이의 학비를 돕기로 하였습니다.◇ 김군의 동정 - 매달 25원씩 보조이 참상을 들은 해주 식당에 숙수로 있는 김원식(金元植)(20)군은 곧 자혜의원으로 인도하여 치료케 한 결과 곧 다시 소생케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 어머니 되는 최씨 부인의 맘이야 어떠하였으리오. 졸도하여 죽어 넘어진 아들은 앞에 있으되 돈 한 푼 없어 자기는 꼼짝할 힘이 없고 당장 창준이가 다니는 학교에 교사로 있는 자기의 친정 아버지가 있으되 그 아들과 며느리의 질투가 무서움인지 어떠냐는 말 한마디 커녕 약 한봉지 값도 주지 않았습니다.더욱이 성마리아 앞에서 자기 누이의 장래를 약속하던 소위 지사인 최씨 부인의 오라버니 되는 이는 고개 한 번 기웃하지 않음을 볼 때에 이 금전으로서만 행사하며 돈! 이것만을 아는 자기 오라버니를 원망하는 이보다 이 더러웁고 추악한 세태를 한없이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반면에 친분도 없는, 앞에서 말한 김원식 군이 매달 25원이라는 돈으로 가계를 보태어 줌으로 그 식구에게는 한 줄기의 살 길이 비추었습니다.◇ 없는 자의 설움 - 형제가 남만 못해이렇게 지내는 동안에 어느 덧 여름이었습니다. 어떤 여학교에서 교수하는 자기의 동생이 오라버니의 집에 돌아와서도 한 고개 넘어 살고 있는 형을 한번도 찾아오지 않을뿐더러 최씨 아들과 오라버니 아들을 길에서 한꺼번에 만나도 최씨 아들은 본 체도 않고 오라비의 아들은 쓰다듬어 만지고 귀여워하는 것을 보았다는 어린 아들 창준의 서러운 사정의 하소연을 들을 때 누구나 다르랴 그의 맘에는 한낱 자식을 사랑하는 맘에 분개한 생각을 금치 못하였으나 오직 쓰린 운명 만을 한탄하였을 뿐입니다. 여름 동안에 친정에 와 있을 때 거기서 울려 나오는 풍금 소리를 들으러 거기로 들어가려하면 문까지 거는 일이 있었답니다. 이 뿐 아니라 그의 친정에서는 개가(改嫁)하라고 자못 성가시게 굴었답니다.◇ 남편 찾아 상해로 곧 떠날 터이다이런 가운데서 그의 은인이라 할만한 김군의 도음으로 어린 아이들의 공부를 시키고 지났습니다. 그 기나긴 동안에 한번 간 그의 남편은 소식조차 망연하여 생사까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3년 전에 상해(上海)에서 해주 사람이 그가 기다리는 남편 봉근씨를 만났었는데 그는 자기의 가족을 자기 처남에게 맡기었으므로 아주 안심하더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듣는 최씨 부인의 맘은 더 미여지는 듯 하였습니다. 그 후에 아들 창익이도 상해로 건너간 소식을 들은 최씨 부인은 어린 아들 3형제와 딸 창수(昌壽)를 데리고 좀 더 자유로운 지대로 가서 혹이나 남편을 만날까하는 생각으로 김군과 함께 상해로 며칠 후에 떠날 터이라는데 그 어린 남매들은 수양산 머리에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빨리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합니다. (끝)● 추억과 기억에도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지난 3월 26일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는 안 의사 순국 115주년 추모식현장을 취재차 다녀왔습니다. 의식있는 일본인들까지 내한해 참석한 추모식은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매년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게 한 고인의 숭고한 뜻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이어가기 위해 매년 행사가 열리고 어떤 언론들은 그 행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 시대 당시에는 유족들이 주변의 두려움과 그로 인한 냉대 속에 외롭게 살았다는 것을 100년 전 기사와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도 정치의 영향을 받습니다. 1925년에 언론이 안 의사의 남겨진 친척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한 것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기사에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안중근의 동생 이름은 안정근(1885-1949. 건국훈장 독립장)과 안공근(1889~ 사망연도 미상. 건국훈장 독립장)입니다. 기사에서 언급된 안봉근과 안명근(1879~1927. 건국훈장 독립장)은 안 의사의 사촌동생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진은 안 의사의 사촌 계수씨와 오촌 조카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사촌지간이 같은 동네에서 자라고 아주 가까운 관계이다 보니 신문에서 그들을 형제라고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