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다가온 기후변화, 손놓고 기다릴 수는 없다[광화문에서/이성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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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정책사회부 차장
이성호 정책사회부 차장
‘SORRY, OUT OF SERVICE.’

지난해 9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주유소. 세 번째 찾은 주유소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주유기가 8개나 있었지만 노즐마다 노란색 비닐이 씌어 있었다. 영어로 ‘미안하지만 서비스는 끝났어요’라는 문구가 인쇄된 비닐이다. 판매할 기름이 바닥난 것이다.

지난해 9월 필자는 이렇게 주유소를 찾아 헤맸다.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마침 연수 중이던 이 지역을 관통한다는 예보 탓이었다. 허리케인이 남부 플로리다에 피해를 주는 건 종종 있지만 남동부 내륙까지 진출하는 건 드물다. 게다가 플로렌스는 4등급(5등급이 가장 강력하다)으로 발달해 ‘괴물’로 불렸다. 최고 풍속이 시속 215km에 육박했다.

사재기는 허리케인 상륙 4, 5일 전 시작됐다. 주유소마다 차량이 줄지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뭘 저렇게까지 하나’라는 생각이었다. 허리케인이 내륙에 다가오자 모든 학교가 휴업을 결정했다. 스포츠 경기가 취소되는 등 야외 활동도 전면 금지됐다. 주민 170만 명에게 대피령이 내려졌다. 뒤늦게 주유소를 찾았지만 기름은 없었다. 월마트 등 대형마트의 진열대도 텅 비었다.

과거 미국의 사재기 장면을 뉴스로 볼 때마다 솔직히 비웃었다. “선진국인데, 사람들 의식은 별로네”라며 은근히 깎아내렸다. 하지만 직접 경험한 사재기 현장의 분위기는 많이 달랐다. 허리케인 상륙 일주일 전 학교와 시청은 가정통신문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리스트를 보낸다. 한 명이 하루 마실 수 있는 1갤런(약 3.7L)의 물, 통조림 등 상하지 않는 음식, 휴대용 랜턴과 배터리 등 꼼꼼한 내용이 모든 가정에 전달된다. 시민들은 리스트를 들고 마트를 찾는다. 새치기나 몸싸움은 없었다. 다가올 재해에 차분히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대형 허리케인이 반복되면서 사재기는 시민의식의 일탈이 아니라 일상 속 안전대책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18호 태풍 미탁이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 링링, 타파 등 ‘가을태풍’ 3개가 열흘가량 시차를 두고 릴레이하듯 찾아오는 건 이례적이다. 한 해 동안 태풍 7개가 온 것도, 10월 태풍도 흔치 않다. 기상 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를 원인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한반도를 타깃으로 하는 태풍이 앞으로 더욱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세먼지도 예외가 아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온도도 계속 상승하고 있다. 고위도와 저위도 지역의 온도 차가 줄어들면 대기 흐름이 약해진다. 대기가 정체하면 미세먼지가 머무는 시간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일주일이나 열흘씩 미세먼지에 고통 받을 수 있다. 기후변화가 한파와 폭염, 미세먼지와 태풍의 강도를 키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후변화를 먼 미래의 일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 마스크를 쓰고 공기청정기를 켜는 게 일상이 됐다. 머지않아 태풍이 올 때마다 사재기가 일상이 될 수 있다. 정부의 환경정책이 더 이상 ‘경제성’이나 ‘효율성’에 밀리면 안 되는 이유다. 우리가 커피전문점에서 다회용 컵을 사용하고 마트에 쇼핑백을 가져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손놓고 있기에는 기후변화가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다.

이성호 정책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기후변화#태풍#미세먼지#지구온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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