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철 “데모대 100만∼200만명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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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99>강경책

1979년 초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왼쪽). 동아일보DB
1979년 초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왼쪽). 동아일보DB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인 10월 18일 이른 새벽에 부산계엄사령부에 도착한다. 현장을 둘러본 그는 깜짝 놀란다. 며칠 뒤 10·26으로 체포된 후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그는 부마항쟁의 성격과 민심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부마사태는…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 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 경찰차와 수십 개소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바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렸지만 질책만 들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이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 사태는 체제 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시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4·19)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해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차 실장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절대로 말(言)만에 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며 이렇게 덧붙인다.

‘박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하여져서 국가 안보조차도 집권욕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제가 속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모로 비교도 하여 보았지만 박 대통령은 이 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부마민중항쟁이 진행되는 동안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하에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는 강경론이 우세했다는 증언이 있다. 1978년 말부터 79년 10·26 전까지 박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한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회고록(‘하나님의 은혜’·2013년)에서 밝힌 내용이다.

‘군(軍) 계통과 중앙정보부의 현지 상황 보고 내용은 “폭동화된 (부마)시위는…현 정치 판도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불만이 팽배한 원인”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경호실, 공화당, 경찰 치안 계통은 “야당의 선동 책략에 밀려 현지에 투입된 진압 부대의 소극적인 진압 태도로 더욱 불안한 형국이 만들어지고 있다. 계엄을 선포한 이상 강력한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엄중하게 시위대를 진압 해산시키고 YS의 국회의원직 박탈을 강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강경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다시 김 실장의 말이다.

‘차 실장의 주장에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다. 온건적 자세를 견지한 그룹은 계엄사령관, 중앙정보부장, 공수특전단장 정병주 장군 등이었으나 안하무인인 차 실장에 의해 끌려가는 판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전후 양상에 연연하지 않고 매사 강경한 처리를 바라는 것이 대통령 성향이라서 (결국) 강경 일변으로 회의 결론이 내려지고 말았다.’

한편,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71년부터 10·26이 날 때까지 만 9년간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일한 유혁인(1999년 작고)은 “그 당시 내가 본,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누구 하나 대통령 앞에서 소위 직언(直言)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실제로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다”(유고집 ‘만월홍안·滿月紅顔’)고 말한다. 그의 말이다.

‘현실적인 애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절대적인 소신을 갖고 있는 대통령을 어떻게 설득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연 그 실체랄까 내용을 어떤 방향으로 정립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을 설득한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바로 (유신 헌법) 개헌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이어서 “당시 박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헌법은 손대지 않는다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면서 72년 유신헌법을 만들 당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헌법 제정 당시 시한을 설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1980년까지’로 정하는 자구를 넣었으나 내부심의 과정에서 기각되었다. (나 역시) 대통령의 논리에 수긍이 안 되는 면이 있어서 시무룩하게 있었으나 그 뒤 (내가) 정치를 실제 운용하는 과정에 있어 보면서 그분(대통령)의 뼈저린 체험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헌법을 고치고 체제를 고치고 하는 것이 필요하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국내 여건을 극복하기 위한 비상체제로 유신헌법을 만들지 않았는가, 이것을 언제 끝내고 내가 언제 그만둔다는 것을 내외에 선포하면 그날부터 내 말 듣는 사람은 없어지고 다음 차례가 누구인가, 또 그 다음 차례 사람한테 모든 것이 몰려가 결국 유신체제라는 것이 기껏 한 6년, 대통령 더 해먹기 위해 만든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유혁인은 “헌법에 손을 댄다는 것은 아예 입에 올릴 수 없는, 금기시되어 온 당시 분위기에서 내부적으로 ‘개헌’을 거론하고 제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지금의 잣대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초기에는 다소 방관 내지 비판적이던 여권 인사들도 밖으로는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 모르겠고, 10·26 이후에는 완전히 딴소리들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대통령 앞에서는 강경론을 펴거나 (강경론을 주장하는 대통령에) 동조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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