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현역 故이순재 “연기엔 끝이 없어…도전이 있을뿐”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25일 10시 23분


2022년 연극 ‘갈매기’에서 연출가로 도전한 배우 이순재. 동아일보 DB
2022년 연극 ‘갈매기’에서 연출가로 도전한 배우 이순재. 동아일보 DB
70년간 연기 인생을 이어오며 세대를 넘어 사랑받은 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91세 일기로 별세했다. 지난해부터 건강이 약해진 그는 병원 치료를 받으며 복귀에 힘썼지만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뉴스1 DB) 2025.11.25
70년간 연기 인생을 이어오며 세대를 넘어 사랑받은 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91세 일기로 별세했다. 지난해부터 건강이 약해진 그는 병원 치료를 받으며 복귀에 힘썼지만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뉴스1 DB) 2025.11.25
구순(九旬)에도 연기의 열정을 뜨겁게 불태웠던 배우 이순재 씨가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리어왕’처럼 엄숙하면서도 ‘꽃보다 할배’만큼 푸근했던 삶을 남기고. 향년 91세.

1934년 함경북도 회령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등학교 1학년 때 6·25전쟁을 겪었다. 피란을 다니다 대전에 정착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가려고 했으나 떨어졌다. 골방으로 들어가 이듬해 다시 시험을 봐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단역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머큐쇼 역할을 하면서 본격적인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영화 ‘초연(1966)’의 배우 이순재(사진=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초연(1966)’의 배우 이순재(사진=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이별없이 살았으면(1970)’ 배우 이순재
영화 ‘이별없이 살았으면(1970)’ 배우 이순재
MBC ‘거침없이 하이킥’
MBC ‘거침없이 하이킥’
스타는 아니었다. 그저 꾸준했다. TV만 틀면 이순재가 나오네’란 말까지 있었다. 상복은 없었지만, 연기를 쉰 적이 없다. 정치를 할 때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등을 찍었다. 작품을 400편 정도 했다.

해보지 않은 역할이 없었다. 범인 역할만 30번 이상 했다. ‘허준’이나 ‘이산’처럼 사극에서 맹활약했고,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선 ‘야동 순재’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 시청자에게 푸근한 개인적 면모를 선보이기도 했다.

리어왕 역의 배우 이순재가 10일 서울 SNU 장학빌딩 베리타스홀에서 열린 연극 리어왕 연습실 공개 행사에서 장면시연을 하고 있다. 2023.05.10 [서울=뉴시스]
리어왕 역의 배우 이순재가 10일 서울 SNU 장학빌딩 베리타스홀에서 열린 연극 리어왕 연습실 공개 행사에서 장면시연을 하고 있다. 2023.05.10 [서울=뉴시스]
리어왕 역의 배우 이순재가 10일 서울 SNU 장학빌딩 베리타스홀에서 열린 연극 리어왕 연습실 공개 행사에서 장면시연을 하고 있다. 2023.05.10 [서울=뉴시스]
리어왕 역의 배우 이순재가 10일 서울 SNU 장학빌딩 베리타스홀에서 열린 연극 리어왕 연습실 공개 행사에서 장면시연을 하고 있다. 2023.05.10 [서울=뉴시스]
늘그막에 다시 돌아온 곳은 연극 무대였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햄릿·오셀로·맥베스·리어왕)을 못 해본 게 가슴에 남아 2021·2023년 ‘리어왕’을 무대에 올렸다. ‘리어왕’은 연일 만원 기록하기도 했다.

“통치자로서 여민동락(與民同樂·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다)을 강조한 3막 4장의 독백은 오늘날에도 갖는 의미가 큽니다. 한평생 배우로 살아보니, 연극에는 우리 사회를 바꿀 힘이 있다고 믿게 됐어요.”(2023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21일 개막하는 연극 ‘갈매기’의 연출가로 나선 배우 이순재. 그는 “연극은 관객과 소통하는 작업이다. 어떤 형식이 됐든 관객이 내용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처음 보는 관객들도 단박에 내용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1일 개막하는 연극 ‘갈매기’의 연출가로 나선 배우 이순재. 그는 “연극은 관객과 소통하는 작업이다. 어떤 형식이 됐든 관객이 내용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처음 보는 관객들도 단박에 내용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022년 연극 ‘갈매기’에서 연출가 겸 배우(쏘린 역)로 관객과 만났다. 현역 최고령 배우에 이어 자칭 ‘최고령 신인 연출가’ 타이틀까지 갖게 됐다.

“연기엔 끝이 없습니다. 완성도 없죠. 새로운 도전과 창조, 노력만 있습니다. 조금 더 잘하는 사람, 더 오래한 사람만 있을 뿐이지 그게 연기의 끝이고 완성은 아닙니다. 저 역시 아직 끝을 보진 못했어요. 성한 몸으로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진 해보려 합니다.”(2022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고인은 문화예술계를 이끌기도 했다. 1971년 연기자협회 초대 회장으로 동료들의 권익을 지켰다. 세종대와 가천대에서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2002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진제공=뉴스1 / KBS
사진제공=뉴스1 / KBS
유난히 상복 없던 고인에게 영광의 순간이 찾아온 건 2025년 1월. ‘2024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KBS 2TV 드라마 ‘개소리’로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구순(九旬)의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받은 연기대상이었다. 지상파 3사 연기대상을 통틀어 역대 최고령 수상이란 기록도 세웠다. 고인은 자신을 사랑한 시청자에게 공을 돌렸다.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날도 있네요. 언젠가는 한번 기회가 오겠지 하고 늘 준비하고 있었어요. 시청자 여러분,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인은 2025년 데뷔 70주년을 맞아 동료 배우 박근형과 ‘세일즈맨의 죽음’을 준비했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를 하다 쓰러져 결국 포기하고 세상을 떠났다. 세일즈맨처럼 성실하고 끈질기게 걸어온 연극인의 삶을 남기고.

“관객들이 내 연기에 공감하는 것은 하얗게 센 내 머리 때문이었을 거야. 주연 한 번 맡아보지 못했지만 일생을 연극무대에 바친 노배우가 젊은 후배에게 무대를 내주며 퇴장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한국 연극의 백그라운드이자 정서야. 지난 연기 인생을 돌아보면 한국에서 배우로 살기란 녹록지 않았지. 평생을 살며 연극무대로 돈을 번 적 없었어. 그래도 연극은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고, 체험의 장이라는 생각은 언제나 변함없어.”(2008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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