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제왕의 항복…코인시장엔 호재라고? [딥다이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25일 10시 00분


코멘트
가상화폐 업계의 왕이 미국 정부 압박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세계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 바이낸스 창업자인 자오창펑(趙長鵬) 이야기인데요. 자금세탁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막대한 벌금과 함께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됐죠.

바이낸스와 자오창펑이 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관심 끄는 뉴스가 아닐 수 없는데요. 동시에 가상화폐 시장 입장에선 오히려 잘된 일일 수 있단 분석도 나옵니다. 왕좌에서 내려온 자오창펑, 그리고 바이낸스 제국을 들여다봤습니다.
21일 미국 시애틀 법원에 출석한 자오창펑 바이낸스 창업자. 평소의 티셔츠나 후드티 차림이 아닌 파란색 양복과 하늘색 넥타이가 눈에 띈다. 그는 이날 자금세탁 관련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CEO직에서 물러났다. AP 뉴시스


5.5조 벌금 맞은 바이낸스
43억 달러(5조5000억원). 21일 바이낸스가 미국 정부와 합의한 벌금 액수입니다. 미국인 고객이 북한·이란·러시아 같은 제재 대상 국가 또는 하마스·이슬람국가 같은 테러단체와 가상화폐를 거래하는 걸 알고도 중개한 혐의에 대해 자오창펑 CEO가 유죄를 인정한 건데요. 미국 역사상 기업이 낸 벌금 중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과거 비슷한 혐의로 HSBC가 냈던 벌금과 비교해도 두배 수준이죠.

그 정도 벌금이면 회사가 휘청거리는 거 아니냐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이낸스이니까요.

1억6000만명 넘는 고객을 둔 바이낸스는 가상화폐 거래 시장 점유율이 44%에 달합니다. 전 세계 가상화폐 현물과 파생상품 거래의 절반 가까이가 바이낸스를 통해 이뤄지는 거죠. 올해 1분기 62%였던 점유율이 많이 떨어진 게 이 정도입니다. 매출이나 이익 같은 재무정보를 공개하진 않지만, 거래마다 0.1%가량을 수수료로 떼니까 엄청난 돈을 쓸어 담고 있겠죠. 월스트리트저널에 의하면 이미 바이낸스는 벌금을 내려고 현금 80억 달러를 확보해뒀다고 합니다.

벌금이 아무리 많아도 바이낸스 입장에선 최악은 아닙니다. 합법적 테두리 안에선 계속 운영할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재무부 산하기관의 모니터를 받는 조건이 붙긴 했는데요. 적어도 ‘바이낸스가 문 닫을까 걱정해서→고객들이 가상화폐를 인출하려 몰려들고(코인 런)→그것 때문에 회사가 망하는’ 일은 없을 거란 뜻이죠.
바이낸스는 앞으로 미국 재무부 산하 기관의 모니터링을 받게 된다. 동아일보DB
바이낸스는 앞으로 미국 재무부 산하 기관의 모니터링을 받게 된다. 동아일보DB
이번 합의로 자오창펑은 앞으로 3년간 바이낸스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됐는데요. 그래도 바이낸스 최대 주주(지분율 90% 추정) 권한은 잃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의 엄청난 부엔 아무런 타격이 없죠. 가상화폐 호황기였던 2022년 1월 자오창펑의 재산은 무려 960억 달러(약 115조원)에 달해 세계 11위였는데요(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 기준). 이후 많이 줄어든 게 230억 달러(세계 69위)입니다. 아직 자오창펑에 대한 재판은 남아있는데요. 미국 언론에서는 유죄판결을 받아도 18개월 이내의 형을 받을 거라고 전망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이낸스와 자오창펑은 망하진 않았습니다. 샘 뱅크먼 프리드의 FTX(2022년 11월 파산한 미국의 가상화폐 거래소)나 권도형의 테라(2022년 5월 붕괴된 스테이블코인 시스템)와는 달리, 살아남는 데는 성공했죠. 가상화폐 투자자들은 이에 안도했습니다. 바이낸스 벌금 소식에 비트코인 가격이 살짝 내렸다가 다시 오른 게 이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바이낸스와 자오창펑 모두에 고의로 법을 위반한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 칼럼 표현대로 “두 개의 가장 큰 가상화폐 거래소(FTX와 바이낸스) 중 하나는 사기, 다른 하나는 돈세탁범”인 것으로 밝혀진 거죠. ‘CZ’라는 이니셜로 불리던 가상화폐 업계의 최고 리더, 자오창펑의 신화는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설립 8개월 만에 업계 1위 신화
1977년생인 자오창펑은 권도형(1991년생)이나 샘 뱅크먼 프리드(1992년생)처럼 젊지도 않고, 스탠퍼드대학 출신도 아닙니다. 그다지 화려한 스타성 있는 인물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런 그가 가상화폐 업계에서 거물이 된 건 바이낸스의 놀라운 성공 스토리 덕분입니다.

중국 출신인 자오창펑은 12살에 캐나다로 이민 간 중국계 캐나다인입니다. 그는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뒤 주로 증권 거래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요. 2013년 ‘순자산의 10%만 비트코인에 투자해라. 아마 10배가 될 거다’라는 친구 조언을 계기로 가상화폐에 눈을 뜹니다. 그는 비트코인 백서를 읽은 뒤 완전히 빠져들었죠. 상하이 아파트까지 팔아 비트코인에 몽땅 투자했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60% 넘는 손해를 봤지만, 더욱 가상화폐 세계에 몰두합니다.

2017년 7월 그는 바이낸스 코인(BNB)을 출시해 ICO(초기 코인 공개)로 1500만 달러를 벌어들입니다. 이를 밑천으로 바이낸스 거래소를 설립하죠. 마침 가상화폐 가격이 가파른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던 타이밍이었습니다. 바이낸스는 매일 사용자 수가 5000명씩 증가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커나갔죠. 설립 8개월 만에 바이낸스는 세계 거래소 중 거래량 1위로 올라서며 업계를 놀라게 만듭니다. 무명이었던 그는 단숨에 포브스 표지 모델이 되었죠.
바이낸스는 2017년 설립 직후부터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바이낸스 홈페이지
바이낸스는 2017년 설립 직후부터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바이낸스 홈페이지
이러한 급성장 요인으로는 수수료율이 낮으면서도(기본 0.1%), 웬만한 코인은 다 상장돼 있을 정도로 상품이 다양하다는 점이 꼽힙니다. 한국의 거래소에선 찾아볼 수 없는 최대 125배 레버리지 파생상품도 있다고 하죠(코인 현물 가격이 1% 오르면 125% 수익률). 아울러 람보르기니를 경품으로 내거는 등 마케팅도 공격적으로 벌였습니다. 무엇보다 이메일 주소만 있으면 누구나 바이낸스 거래 계좌를 만들 수 있도록 익명성을 보장해서 큰손들을 끌어모았는데요.

정작 자오창펑 본인은 바이낸스 성공 비결이 ‘서비스 품질’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2017년 당시 가상화폐 거래소 시스템은 느리고 인터페이스는 투박했습니다.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자 모든 사이트가 다운됐죠. 우리는 교환 속도를 더 빠르게 했고,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훨씬 더 좋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본사 없어서 규제 못 한다?
자오창펑은 “가상화폐엔 국경이 없다는 점을 좋아한다”고 여러차례 밝혔다. 바이낸스가 본사를 두지 않은 것도 이러한 가상화폐에 맞는 사업방식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동아일보DB
바이낸스가 경쟁사와 가장 다른 점은 본사가 따로 없다는 점입니다. 공식적인 은행 계좌나 공개 주소도 없죠. 점조직 형태의 탈중앙화된 ‘무국적 거래소’를 초기부터 표방했는데요. 따라서 어느 정부의 관할 아래 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게 바이낸스의 주장입니다. 이 때문에 2017년 중국 정부가 가상자산 거래소 영업을 전면 중단했을 때도 바이낸스는 끄떡없었습니다. 중국 시장의 선발주자였던 오케이코인(오케이엑스)과 후오비가 크게 타격 입은 것과 대조적이었죠.

국적이 없기 때문에 어느 나라의 규제도 통하지 않는다? 궤변처럼 들리지만, 이런 주장은 실제로 통했습니다. 바이낸스는 철저히 사무실이나 서버 위치를 비밀로 하며 규제를 피해 갔죠. 이를 위해 자오창펑은 직원들에게 바이낸스에서 일하는 걸 밝히지 말고 내부 커뮤니케이션 기록은 바로 삭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대놓고 “불필요한 규제를 피하기 위해 매우 창의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죠.

동시에 자오창펑은 돈에 관심이 없고 자동차나 집도 소유하지 않는, 바이낸스 로고가 박힌 티셔츠나 후드티를 입고 다니는 수수한 이미지로 어필했습니다. 본인 추정으로는 2022년 비행기 안에서 580시간을 보낼 정도로 전 세계 가상화폐 컨퍼런스의 단골 초청 게스트였는데요. 지난해 강력한 경쟁업체 FTX까지 무너지면서, 바이낸스 제국의 위상은 더 공고해졌습니다. 참고로 2022년 11월 FTX 파산엔 자오창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자오창펑이 FTX 관련 코인(FTT)을 전량 매도했다고 밝히면서 코인런 촉발)는 지적도 나옵니다.

꼼수는 통하지 않았다
바이낸스는 오래전부터 미국 정부의 타깃이 되어왔습니다. 수년 전부터 불법 거래 혐의로 조사해왔다고 하죠. 물론 자오창펑은 이를 피하기 위해 근거지를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 다녔고요. 하지만 그의 ‘무국적 거래소’ 꼼수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부는 그가 미국 거주자에 대한 고객신원확인 규정을 어겼고, 자금 세탁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묵인·방조했다는 여러 증거와 증언을 확보하는 데 성공합니다.

미국 정부의 법원 서류에 따르면 자오창펑은 바이낸스에 미국 고객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고객을 차단한다면 “바이낸스는 오늘날처럼 크지 않을 것”이라는 내부 채팅을 남기기도 했죠. 미국 거주자는 바이낸스 전체 사용자의 16%에 달했지만, 이를 숨기기 위해 바이낸스는 사용자 위치를 “UNKWN(‘UNKNOWN’을 의미)”으로 고칩니다. 이를 두고 자오창펑은 “허락보다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 낫다”면서 상황을 “회색지대”라고 묘사했습니다. 빠른 성장을 위해 규제 따위는 잠시 모른 척한 거죠.

이전에 자오창펑은 바이낸스에 대해 미국 규제당국이 제기한 혐의들이 모두 ‘퍼드(FUD)’라며 적극적으로 반박해왔습니다. FUD는 공포(Fear)·불확실성(Uncertainty)·의문(Doubt)의 약자인데요. 가상화폐 업계에서 가짜뉴스, 악성루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과거 그는 FUD를 의미하는 손가락 네개를 펼친 사진을 자신의 X(트위터) 계정에 올리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인 적 있죠. 하지만 그가 유죄를 인정하면서 이는 벌금 40억 달러를 의미하는 사진으로 패러디됩니다.
자오창펑이 유죄를 인정한 뒤 X(트위터)엔 바이낸스가 40억 달러 넘는 벌금을 맞은 것을 조롱하는 게시물이 올라와 공유되고 있다. 자오창펑이 과거에 바이낸스에 대한 각종 혐의가 거짓이라며 올렸던 사진을 놀림감으로 삼았다. X 화면 캡처
자오창펑이 유죄를 인정한 뒤 X(트위터)엔 바이낸스가 40억 달러 넘는 벌금을 맞은 것을 조롱하는 게시물이 올라와 공유되고 있다. 자오창펑이 과거에 바이낸스에 대한 각종 혐의가 거짓이라며 올렸던 사진을 놀림감으로 삼았다. X 화면 캡처


가상화폐 시장엔 호재라고?
자오창펑의 뒤를 잇는 바이낸스 CEO는 싱가포르 규제기관 출신 인물인 리처드 텅입니다. 하지만 실제 주도권은 바이낸스 공동 창업자이자, 자오창펑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결혼은 하지 않음) 허이(He Yi) 최고마케팅책임자(CMO)가 쥐게 될 거란 관측도 나오죠.

미국 정부의 엄격한 감시를 받게 된 바이낸스가 과연 지금 같은 제국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규제를 다 따르면서도 고객 기반을 잃지 않기란 사실 쉽지 않죠. 다만 바이낸스 입장에선 어차피 규제 틀 안으로 들어오는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그 길을 택한 건데요. 달리 보면, 미국 정부 역시 까다로운 조건을 달긴 했지만 바이낸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뜻입니다. 블룸버그 칼럼 표현대로 “미국 규제당국이 합법적인 이민자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죠.

바로 이 때문에 이번 미국 정부와 바이낸스의 합의로 다음 단계의 진전, 예컨대 증권거래위원회(SEC)의 현물 비트코인 ETF(상장지수펀드) 승인까지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이낸스 사태가 ‘가상화폐 시장엔 호재’라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다는데요. 역시나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시장입니다. By.딥다이브

참 극적인 성공도, 갑작스런 몰락도 많은 가상화폐 시장입니다. 권도형, 샘 뱅크먼 프리드, 그리고 자오창펑까지. 신화적 인물들이 줄줄이 범죄자로 전락하는 모습이 놀랍습니다. 그 와중에도 충격을 빠르게 회복해 가는 비트코인 가격도 신기하고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미국 정부가 자금세탁 등의 혐의로 바이낸스가 43억 달러의 막대한 벌금을 매겼습니다. 자오창펑은 유죄를 인정하고 CEO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중국계 캐나다인 자오창펑은 2017년 바이낸스를 설립한 뒤 8개월 만에 전 세계 거래소 1위로 만들어내며 업계 거물이 됩니다. 본사를 따로 두지 않은 ‘무국적 거래소’ 컨셉으로 규제를 교묘히 피해갑니다.

-하지만 미국 규제당국의 집요한 조사에 결국 덜미가 잡힙니다. 자오창펑은 바이낸스의 빠른 성장을 위해 규제를 일부러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로써 바이낸스는 규제의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다음 단계의 진전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정말 이번 사태가 가상화폐 시장엔 호재가 될까요?

*이 기사는 2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